[글 쓰는 엔지니어] 아무도 몰라주는 프로그램 개발자로서의 삶, 4부 리습 (LISP)으로 재능 기부

 

 

엄청난 경험을 하고 나서 저는 완전히 엔지니어로서 설계 시스템에 적응했고, 필요한 프로그램들을 하나씩 늘려갔습니다. 12년간 설계를 하다 보니 제가 개발한 리습 (LISP) 프로그램만 300개 이상이었습니다. 불필요한 단순 반복작업을 없애고 실수를 원천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엔지니어링 관련 업무에만 더욱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저에게 많아진 여유 시간을 다른 공부에 투자할 수 있었습니다. 남는 시간에 원어민에게 영어를 배웠고, 미국토목기술사 PE 자격증과 PMP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저와 함께 설계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많았습니다. 웬만한 것들은 제가 개발한 프로그램으로 다 해결되니 자연스럽게 팀원들 모두 여유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팀 내에서 인기가 좋았습니다. 같이 일하면 편하니까요. 게다가 남는 시간에 공부한 것들에 대한 정보와 노하우를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할 수 있게 되고, 경험이 깊어지고 넓어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할 수 있는 기회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크고 잘 나가는 설계 회사로 이직하고 나서 보니 거기에는 이른바 ‘캐드 여직원’이라고 부르는 도면 작성에 최적화된 기능직 직원들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아침에 출근해 보니 엎드려서 자고 있길래 커피 한 잔 사주며 자초지종을 물어봤습니다. 엔지니어가 아니다 보니 이미 엔지니어가 작성해 준 도면 천 장 정도 분량을 혼자서 편집해서 오늘까지 끝내야 하는데 일주일을 밤을 새워도 도저히 끝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편집이냐고 물으니 종횡단면도 수천 개를 프로그램에서 뽑아내서 도면 하나에 몽땅 넣은 뒤 도면으로 보기 좋게 크기에 따라 2~5개 정도로 나누어 담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잠시 알고리즘을 고민하다가 가능하겠다 싶어서 안쓰러운 마음에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여직원에게는 사우나 가서 잠이라도 자고 퇴근할 때 쯤에 돌아오라고 한 뒤, 리습 프로그램을 두어 시간 만에 뚝딱 만들었습니다. 도면 천 장을 한 시간 만에 컴퓨터 혼자서 다 만들더군요. 개발부터 작업 완료까지 반나절 정도 걸렸습니다. 돌아온 여직원에게 보여주니 깜짝 놀라더군요. 고맙다며 제 책상에 커피 한 잔 사서 올려 놓고 칼퇴근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했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프로그램을 주고 마음껏 사용하도록 했고 회사 내에서 일 잘하기로 소문난 직원이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개발한 리습 프로그램 얘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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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오토캐드 사용자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커뮤니티는 단연 고캐드 (GOCAD) 였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모르는 부분을 물어보고 답을 구한 적도 있던 터라, 나중에 실력이 어느 정도 생기고 나서는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고캐드에 가서 질문들에 대한 답을 달아주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그림아이’라는 닉네임으로 오토캐드에서는 이미 이름이 조금 알려진 상태였습니다. 리습을 독학한 이후로 저는 리습에 대해 나름 컬럼도 쓰고, 질문들에 최대한 자세히 답을 달아주면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하루에 많게는 10개 이상 답을 달기도 했고, 간혹 아예 설명하다가 지쳐서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곳에 오는 사람들 모두 저와 같이 야근을 밥 먹듯 하면서 고달프게 사는 사람들일 것이 뻔하므로 동병상련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분명 저도 도움을 받은 적이 많았으므로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도 있었습니다. 그때가 바로 엔지니어면서 동시에 프로그램 개발자로서의 삶을 함께 살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프로그램 개발은 오롯이 제가 일하는 곳에서 단순 반복 작업을 없애고 불합리한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서만 사용했고 남들에게 재능을 기부하는 것에만 집중했습니다. 이런 활동 덕분에 자연스럽게 매일 관심을 갖게 되고, 제가 경험하지 못한 에러들과 사용자들의 사용 환경 들을 간접경험을 통해 체험하면서 실력이 더욱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돈을 기부하든 재능을 기부하든 역시 기부란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얻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