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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엔지니어] 아무도 몰라주는 프로그램 개발자로서의 삶, 2부 설계 엔지니어의 도면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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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언어 3가지를 할 줄 안다고 해놓고 지난 시간은 독학한 계기만 소개하다가 길어져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시리즈로 나누기로 했습니다. 블로그 글쓰기는 공백을 제외하고 600 글자 이상이면 되는데 저는 항상 1,000 글자 이상을 넘기는 것 같습니다. 브런치에 써서 책을 출판할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할말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왕 매일 글쓰기를 실천하기로 해놓고 할 말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써 놓고 다시 읽어 보면 무슨 소리인지 모를 때도 있고, 문법적으로 맞지 않을 때도 많고, 맥락이 맞지 않을 때도 더러 있습니다. 이러면서 점점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단은 자기 검열에 너무 신경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프로그램 언어는 아니지만 스크립트 (Script)로 자동화라는 개념을 경험한 후로 저는 컴퓨터에 일을 시키는 기계 언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비슷한 스크립트 몇 개를 더 만들어 보고 나니 오토캐드 (AutoCAD)라는 프로그램이 어떤 방식으로 구동되고 있는지 점점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리습 (LISP)을 떠올렸습니다. 오래 전에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오토캐드를 접하고 나서 영어로 된 두꺼운 설명서 맨 뒤쪽은 리습 (LISP)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뭔지도 모르고 한 두 장 따라해 보다가 관두고 이런 것이 있다는 정도만 알고 넘어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오토캐드에서 리습이라는 프로그램 언어를 사용할 수 있어라는 단순한 생각만 갖고 있었습니다. 서점에 가서 리습 관련 책을 찾아 보니 내용이 친절하지는 않았지만 한 두 권 정도 있어서 그 중 나은 것을 하나 사서 틈틈이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였습니다. 프로그램 언어는 공부해본 적도 없어서인지 혼자 독학으로 여러 함수들만 접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아. 외울 수는 없어도 어떤 함수들이 있는지는 알았어. 그래서 뭐? 이제 뭘 해야 되지?’ 라는 것입니다. 싱겁지만 그렇게 시작한 것도 아니고 시작을 안 한 것도 아닌 상태로 어정쩡한 상태로 두고 일 하느라 바빠서 신경을 못 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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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입사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갑자기 업무 지시가 새로 내려왔습니다. 신입이라 설계 프로젝트의 팀원으로만 참여하던 중이었는데 오수관로 20Km 정도를 교체 및 업그레이드하는 사업을 통째로 저에게 맡긴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니 당연히 고참들이 도와줬고, 측량과 오수 맨홀들을 모두 뚜껑을 열고 깊이를 재서 현황도를 만드는 일까지는 어떻게든 했습니다. 이렇게 현황도를 만드는 일만 2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신규 맨홀이 위치할 곳의 선정, 기존과는 달라진 주변 인구 현황, 지하매설물 도면 검토 후 간섭 검토, 펌프장 설계 등 기본적인 입력 (input) 데이터들이 모두 달라지니 고려할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1개월 동안 결정된 입력 값들을 엑셀로 옮긴 뒤 오수 발생량을 계산하고, 그에 따라 중력식 파이프들의 경사와 간섭검토까지 모두 고려하여 입력 했습니다. 말만 제가 담당하는 프로젝트일뿐이지 제가 진두지휘하기에는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 도면으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평면도, 종단면도, 횡단면도, 상세도까지 모두 합쳐 300장 이상 될 것으로 예상이 되었습니다. 당시 귀찮기는 해도 입력만 잘하면 종횡단면도를 자동으로 그려주는 프로그램은 공개되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걱정 없었지만, 문제는 평면도였습니다. 당시 30MB가 넘는 크기의 엑셀 파일의 내용을 그대로 평면도로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테이블로 만드는 일이라면 오토캐드의 다른 기능으로 가능했지만, 회사의 고유 도면 작성법에 맞게 맨홀 정보와 파이프 정보를 모두 옮겨 적어야 했고, 게다가 서로 겹치지 않게 편집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파이프의 길이가 20Km 정도 되었고, 맨홀의 개수가 1,000개 정도 되니 입사 동기 4명이서 함께 한 달 동안 밤을 새우며 일을 했습니다. 맨홀 번호, 맨홀 깊이, 맨홀 중심 좌표, 파이프 길이, 파이프 관경, 파이프의 방위각, 파이프 재질, 파이프 경사 등을 모두 옮겨 적어야 했습니다. 옮긴다고 끝난 것이 아니라 프린트 해서 누군가 옆에서 엑셀의 내용을 불러주면 도면의 내용이 맞는지 검토하는 작업을 하니 추가로 일주일 정도는 꼬박 재작업에만 매달려야 했습니다. 잘 몰랐던 시절이어서 일단 버텨봤습니다. 

 

엔지니어의 삶이 참 고단하다는 생각을 제대로 처음 해봤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너무 자연스러운 엔지니어의 일상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 한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설계라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지 미쳐 몰랐습니다. 동료들과 새벽까지 술을 퍼먹고 집에 터벅터벅 걸어가며 많이 속상했습니다. 이런 게 설계 엔지니어의 삶이라는 것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일이 즐거워야 하는데 즐겁기는커녕, 아무리 밤을 새워도 일이 끝도 없고, 하는 일마다 실수가 나오니 하나도 즐겁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일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몇 개월 동안 친구를 만나거나 좋아하는 영화를 볼 수도 없었습니다. 말도 안 되게 낮은 연봉을 받으면서 열정 페이라고 스스로 다독이는 삶은 정말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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