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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엔지니어] ‘싫어한다’와 ‘좋아하지 않는다’의 차이, 그리고 아이들의 문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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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거의 확실히 언어는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배가 고프거나 몸이 아프다는 것, 그리고 좋거나 싫다는 의사 표현을 하기 위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 시작하고 경제 활동을 하면서 사회적 질서가 필요했을 테니 문자도 자연스럽게 필요했을 것입니다. 인류가 지구를 지배하기 시작했던 것도 도구를 사용한 것 이상으로 언어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언어로 인해 우리는 정보를 교환, 기록, 전달, 매매할 수 있게 되니 인간이 모여 만든 사회가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모습을 갖출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언어는 소통의 도구입니다. 머지않아 인공지능으로 만든 제대로 된 자동 통역기를 사용할 날이 오겠지만 아직 인류는 소통을 위해 외국어를 공부하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습니다.

 

저에게도 영어 공부가 목표 그 자체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영어는 그저 뭔가를 하기 위한 보조적인 ‘툴’로서의 기능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영어 공부를 점수와 성적을 위해 공부했던 학창시절에 배운 영어는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원어민들과 대화할 때 머릿속에서 문장 만들어 내느라 고생만 더 했던 것 같습니다. 실컷 만들어봐야 그들이 쓰지도 않는 표현이었고 문법적으로 정확하지도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원어민들과 대화하면서 언어라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우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표현을 쓰는지, 이 단어는 유래가 어떤지, 어떤 이유로 이런 표현은 쓰면 안 되는지 등에 대해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 지금은 많이 잊어버렸지만 언어 공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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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배운 영어는 must, have to, should는 같은 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괄호나 빈칸에 들어갈 수 없는 말을 찾거나, 밑줄을 치고 같은 말을 고르라는 문제들의 단골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외국인 선생님께 영어를 배울 때는 상황에 맞는 표현과 맞지 않는 표현을 배우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항상 must는 어감이 너무 세니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안 된다고 하니 외웠던 것 같습니다. 왜 세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외국인들이 싫어하는 표현인가보다 하고 거의 안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우리말로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명령하거나, 지시하거나, 부탁할 때 정말 다양한 표현이 존재합니다. ‘해’, ‘해야 돼’, ‘꼭 해’, ‘무조건 해’, ‘반드시 해야 돼’, ‘안 하면 큰일 나’, ‘하는 게 좋을 거야’, ‘해봐’, ‘해줘’, ‘해줄래?’, ‘해줬으면 좋겠어’, ‘하지 그래?’, ‘할래?’, ‘하라니까’, ‘해놔’, ‘해보는 건 어때?’ 등등의 표현에 존댓말까지 더하면 엄청나게 많은 표현이 존재합니다. 이럴 때 보면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들도 참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must, have to, should, had better, be supposed to, be expected to, why don’t you, have got to 이상의 영어 표현은 잘 모르는데 말입니다.

 

한 미국인 영어 선생님에게 그 어감의 차이라는 것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한 주제를 가지고 학원에서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평소에 싫어하는 정치인 얘기를 하길래 “I hate him.”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너무 어감이 세니까 “I don’t like him.”이라고 하면 좋다고 하더군요. 당시에는 뭣도 모르고 알았다고 하고 지나갔지만 학원 끝나고 출근해서 하루종일 고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두 표현이 왜 다르지? 우리말로 “싫어한다”와 “좋아하지 않는다”의 차이는 뭘까? 심하게 이과 성향이 강한 저는 이 단순한 질문에 대한 답을 쉽게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고민하다가 제가 내린 결론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였습니다. “싫어한다”는 말은 제가 속으로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는 말이지만 대화 중에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순화해서 에둘러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만약 누군가 저에게 요리를 해줬는데 단번에 싫다고 하면 상처 받을 수 있으니 “싫어하는 것은 아닌데 그닥 좋아하는 요리는 아니다”라고 길게 돌려가며 말을 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와 배려일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진지하게 대화를 하는 도중에 “싫다”, “나쁘다”, “틀렸다” 등의 표현은 영어나 외국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말로도 어감이 세서 대화를 더 이상 이어가기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좋지 않다”, “맞지 않다” 등으로 감정의 레벨을 낮춰서 말하곤 합니다. 때로는 이런 표현들을 들으면 싫다고 한 것은 아니니 가능성이 있다고 오해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어쨌든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어 공부 자체가 목표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우리말인 한국어부터 완벽하게 이해하고 문해력을 갖추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공감 능력까지 배운 뒤에 본인이 필요할 때 세상 어떤 언어를 배워도 공부가 쉽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언어는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우는 학문입니다. 문화를 모르는데 언어만 배우면 영어를 십수년간 배워도 영어 못하는 우리 세대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문해력이 갈수록 떨어진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문해력이 왜 떨어지는지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마치 아이들의 잘못인양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말을 완벽하게 배우고 이해할 수 있기 전에 낯선 영어를, 그것도 강제로 배우기 시작하므로 우리말의 문해력이 떨어지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영어의 성적과 점수를 목표로 공부하기 때문입니다. 뭔 말인지도 모르고 일단 점수를 잘 받아야 하니 그런 것이고, 엄마가 학원 가라고 윽박지르니 가서 뭔 소리인지도 모르고 듣고 외우기만 해서 그런 것입니다.

 

언어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발전해왔습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감정을 절제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중간 지점 어딘가에서 아이들이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부모들이 도와줘야 합니다. 문해력은 가정에서 대화로 기초가 길러지는 영역입니다. 돈 주고 배우려면 이미 늦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길러지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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