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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엔지니어] 토목 엔지니어가 정의하는 토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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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토목 엔지니어가 태양광 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아이덴티티는 토목 엔지니어입니다. 예전에는 토목 얘기만으로 밤을 새울 자신이 있었는데 업계를 한동안 떠나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이 줄어들게 되고 할말도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친구들과 신문 기사로 접한 건설산업은 지난 20여년간 아파트 건설사업과 4대강 사업 외에는 딱히 국가적으로 토목 분야에서 호재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고 항상 건설경기는 불황이고 사양산업이라는 얘기만 들려옵니다.

 

그나마도 4대강 사업은 부패와 조작으로 점철된 사업이어서 엔지니어로서 참담했습니다. 토목 분야 전문가들이라는 분들도 국가 예산 22조원이 토목 사업에 투입되니 불필요한 것도 필요하다고 하고, 아닌 것도 맞다고 해야 했던 사업이었습니다. 당시 제 주변 지인들 모두 이렇게라도 먹고 살아야지 어쩌겠냐는 반응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정치가 돈을 쥐고 흔들기 시작하면 마치 홀린듯 피리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모습을 알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같은 기술사나 엔지니어들이 불필요한 사업이고 기술적으로 홍수 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비전문가인 일부 정치인들, 보수 언론, 보수 세력들은 마치 종교적 신념인양 달려듭니다. 결론적으로 이미 처음부터 그런 사업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파트 건설사업은 엄밀히 토목이 아닌 건축 분야입니다. 광의의 개념으로 건설산업에는 포함되고, 부지의 선정과 단지 설계, 그리고 토공사와 상하수도 시설 등에 일부 참여는 하지만 토목이 주가 되는 사업은 아닙니다. 그러니 토목 분야는 제가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불경기였고 지금도 불경기라고 앓는 소리들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기술사가 되면 좋든 싫든 자격증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 교육 이수 시간을 증빙하고 갱신해야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토목을 잠시 떠나 있지만 미국토목기술사 자격증 유지를 위해 관련 교육을 2년에 30시간 이상 이수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몸담고 일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여서 점점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하지만 저에겐 언제나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고향 같은 분야여서 애뜻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양광을 하다 보니 이젠 나이만 먹고 토목이 다시 저를 받아줄지 알 수는 없지만 언젠가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은 남아 있습니다. 토목 분야도 지난 10년간 BIM (Building Information Modeling)이라는 건설 정보 모델링을 도입하기 위해 홍역을 치렀고 이제야 본 궤도에 오른 듯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이 있고 엔지니어들 일선에서는 불만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아직은 멀찌감치에서 지켜만 보고 있지만 언젠가 BIM의 한 가운데에서 치열하게 싸워볼 각오는 하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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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한 가운데서 일할 때는 주변 나무들밖에 안 보여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숲을 바라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토목을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라는 점입니다. 대학 때 선배들은 ‘토목은 토목이다’라고 정의했고 저희에게 그렇게 가르치곤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 몰라서 만든 참 무책임한 정의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토목을 ‘지구 위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고 멋지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도로, 교량, 댐, 공항, 항만 등에만 국한된 것일 뿐 상하수도나 토질 및 기초 분야는 땅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대부분이니 토목을 모두 표현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이와 같이 토목은 다루는 분야가 많아서 정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반인들은 건축과 토목을 구분하지 못해서 오해를 많이 합니다. 아파트를 많이 짓는데 토목 경기가 좋은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건설 회사가 토목과 건축을 모두 수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공회사에서 주택사업부와 토목사업부로 나뉘는 경우에만 국한된 것이고 엔지니어링 회사는 보통 건축과 토목 한 분야에 특화된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아파트나 고층 빌딩은 건축사와 건축구조기술사 등이 설계하고 시공을 주도하게 되고, 교량, 항만, 공항, 도로 등은 토목 구조 기술사, 토질 및 기초 기술사, 도로 및 공항 기술사, 토목 시공 기술사 등이 설계하고 시공을 주도합니다. 예전에는 건축과 토목의 구분을 예산의 출처로 하기도 했습니다. 민간이 자본을 대면 건축이고, 국가가 자본을 대면 토목이라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거의 맞는 표현이지만 민자 고속도로와 같이 민간 자본으로 인프라 시설을 구축하기 시작하면서 경계는 예전보다 모호해진 느낌도 있습니다. 다만 다루는 학문으로 볼 때, 건축의 미적인 디자인 관련 분야는 토목이 다루지 않고, 토목의 수리, 수문, 토질, 지반 분야는 건축에서 다루지 않습니다. 구조역학과 재료역학은 공통 분야지만 토목에서의 구조역학은 차량이라는 움직이는 윤하중과 동역학이 더해져 보다 고차원적인 부분까지 다룹니다. 그리고 김진애 건축가의 말처럼 건축과 토목 모두 모든 운동에너지를 끌어 모아 위치에너지로 바꾸는 일을 합니다. 가끔 누군가는 전봇대도 토목이 하느냐고 묻곤 하는데, 도와줄 수는 있지만 분야로 따지면 전봇대는 전기공사여서 전기 엔지니어들이 합니다. 발전소와 변전소들의 대형 시설들을 위해 건축과 토목도 일부 참여하지만 결국 전기 또는 기계 분야가 주가 되는 사업입니다. 엔지니어들은 발전소 사업을 통칭해서 플랜트 산업, 플랜트 사업 등으로 부릅니다.

 

토목은 인류의 문명이 탄생할 때 중요한 기술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니 식수와 농수를 공급해야 했고, 전쟁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해야 하므로 높은 벽이 필요했고, 집들이 침수 피해를 입지 않도록 수로가 필요했으며, 사람들의 이동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도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기술들이 바로 토목 공학이 다루는 분야들입니다. 여기에 하천을 배로 건너는 것이 비합리적이어서 교량을 만들고, 배가 정박하기 쉽게 항만을 조성했으며, 비행기의 발명으로 공항과 활주로까지 다루게 된 것입니다. 토목은 영어로 Civil Engineering이라고 합니다. 한자로 土木이라고 쓰는데 영어와는 완전히 다른 뜻입니다. 영어에서 Civil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이유는 원래 서양에서는 토목 기술을 군사용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간 분야에서 다루는 기술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흙과 나무를 다루는 기술을 의미했으니 토목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도 주제 넘게 정의를 해보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과생들에게 부족한 문과 감수성이 듬뿍 담긴 표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토목이란 집으로 가는 길을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상하수도 분야가 제외되어 있어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결국 ‘인프라’라고 하는 사회 기반 시설 (Infrastructure)에 모든 표현이 다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토목이 도로를 만들어야 주변에 집도 짓고 상가도 생기는 것처럼 도시 계획을 수립하고 인프라를 조성하는 일을 토목이라고 정의하는 것 이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좀 더 멋지게 표현하면 ‘인류의 문명을 만드는 기술’ 또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해주는 기술’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역시 감수성을 더하는 데에는 또 실패한 것 같습니다. 몇 년 더 내공이 쌓이고 나면 더 멋지고 좋은 표현이 떠오르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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