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글 쓰는 엔지니어] 오마카세와 뮤지컬 캣츠

본문

반응형

오마카세와 뮤지컬 캣츠

회사로부터 오랜만에 성과급이 나왔습니다. 이직한지 만으로 5년째 거의 다 되어 가는데 제대로 된 성과급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적자 부서라서 눈치도 많이 보이는 상황이지만 전 직원에게 일괄적으로 성과급이 지급되었습니다. 역시 대기업이 통이 크긴 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꽤 많이 나왔습니다. 저의 20여년 경력에서 가장 많이 받아 본 성과급입니다. 그렇다고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기대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저에게는 분에 넘치는 돈을 받았습니다. 이직을 고민할 정도로 힘든 와중에 잠시 여유를 갖게 되어 기분이 참 좋습니다. 지난 1년간 버틴 보람에 대한 보상으로는 충분하고도 남는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한 턱 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1년간 저만 고생한 것도 아니고 다같이 고생한 것에 대해 크게 보상해주고 싶었습니다. 가끔 먹는 삼겹살 외식이나 배달음식은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고 비싼 음식점들을 검색해봤습니다. 가족들 기억에 오래 남을만한 식당을 찾다 보니 오마카세가 눈에 띄었습니다. 일본에서 오래 근무한 경험이 있던 터라 최근 유행처럼 늘어나고 있는 오마카세 식당은 눈여겨 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비싸고 분위기 있는 식당으로는 오마카세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 리뷰와 별점을 모조리 확인해보고 집 주변에서 가장 번화한 하남 미사 지역의 오마카세 식당 한 곳을 예약했습니다. 저녁으로 1인당 가격이 무려 12만원이었습니다. 평생을 그런 식당을 제 돈 주고 가본 적이 없었는데 크게 마음 먹고 저질러봤습니다. 지금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먹겠냐는 생각과 나만 잘하고 고생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고생했으니 그럴 자격 충분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예약일에 칼같이 시간 맞춰 식당을 찾았습니다. 맛집 추천 리뷰에서 더 자세히 다루긴 했었는데 정말 분위기가 끝내줬습니다. 이래서 다들 오마카세, 오마카세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도 배불리 먹었지만, 무엇보다 요리가 너무 예뻤고 식당 분위기도 정말 예술이었습니다. 가족들만의 좋은 추억 하나 남기기에 손색이 없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조금 걱정되는 것은 이렇게 눈을 높여 놓으면 다음에 외식할 때 메뉴 고르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인생에서 몇 번 안 되는 이벤트인데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결국 이럴려고 돈 버는 것이니까요. 가족들이 행복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가족들에게 크게 한 턱 쏘고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또 하나의 고민이 생겼습니다. 업무시간에 서류 전달을 위해 우연히 세종문화회관 앞을 걸어서 지나가는데 그 앞에 작은 현수막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캣츠 오리지널팀 내한 공연이었습니다. 캣츠 공연은 자주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몇 년에 한 번씩 오리지널 팀이 내한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제가 분에 넘치게도 예술의 전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벌써 26년 전이지만 처음 캣츠 오리지널 팀 공연을 일하면서 공짜로 봤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인들과 가족들에게 틈만 나면 돈 아끼지 말고 캣츠 오리지널 공연은 꼭 보라고 얘기하곤 합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저는 티켓 가격 때문에 감히 엄두를 못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게다가 성과급을 받은 저에게 오리지널 팀이 내한 공연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눈에 띄었습니다. 당장 티켓 가격을 살펴봤습니다. 역시 예상대로였습니다. 젤리클석과 VIP석이 170,000원, R석 140,000원, S석 110,000원, A석 90,000원, B석 60,000원이었습니다. 또 고민과 함께 저와의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이왕 본다면 VIP석에서 봐야 할텐데 3명 합쳐 51만원을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까, 큰 돈을 썼는데 가족들이 좋아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등등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고민 끝에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가족들에게 말했고 다들 너무 좋아하더군요. 제가 결심을 굳히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뮤지컬 캣츠가 가진 컨텐츠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26년 전에 제가 받았던 감동만 믿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럴려고 돈 버는 거라고 말입니다. 역시 가족들이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반응형

 

한마디 덧붙이자면, 우리나라 뮤지컬 업계에는 정말 죄송하지만 저는 우리나라 뮤지컬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무슨 전문가도 아니고 그저 개인 취향일 뿐이지만 저는 첫 시작을 오리지널 팀의 공연으로 시작해서인지 우리나라 뮤지컬에 약간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사대주의라고 해도 어쩔 수 없고 편견이나 잘못된 생각이라고 해도 할 말 없습니다. 예술의 전당에서 일할 때 우리나라 뮤지컬도 많이 봤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명성황후 초연과 같이 국산 뮤지컬들과 우리나라 배우들이 공연하는 외국 뮤지컬들도 많이 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솔직히 별로였습니다. 일단 국산 뮤지컬은 노래가 저에겐 별로입니다. 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멜로디와 어울려서 공연이 끝나도 여운이 남아야 하는데 저에게는 계속 듣기 불편하고 멜로디 자체가 별로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외국 뮤지컬을 국내 배우들이 공연할 때는 더 심각합니다. 멜로디는 외국 뮤지컬에서 가져왔는데 굳이 우리말로 번안해서 가사만 바꿔 부릅니다. 그러니 멜로디에 가사가 잘 붙지도 않고 듣기 불편합니다. 게다가 발성이 제대로 되지 않은 배우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듣는 내내 불안한 적도 많았습니다. 26년 전에 비해 뮤지컬 환경이 많이 좋아졌겠지만 얼마 전에 가족들과 국산 뮤지컬을 하나 보고 왔기 때문에 저의 편견이 맞다는 확신만 더 강해졌습니다. 노래가 별로 안 좋고, 뮤지컬의 내용도 별로고, 배우들의 수준도 모두 다 저에게는 별로였습니다. 당연히 제가 본 외국 뮤지컬들이 성공한 대작들만 봐서 그럴 수 있습니다. 캣츠, 오페라의 유령,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등의 공연을 공짜로 봤으니 전문가라고는 못해도 어디 가서 뮤지컬 좀 봤다고 큰소리 칠 정도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원스, 비긴어게인, 라라랜드 등의 뮤지컬 영화들도 미국이 강세고 국산 뮤지컬 영화는 수준이 낮아도 너무 낮습니다. 그 원인은 제가 얘기한 그대로 입니다. 일단 뮤지컬 영화는 무조건 노래가 좋아야 합니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노래가 좋고 여운이 오래도록 남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뮤지컬은 마치 “이 부분에서는 그냥 노래를 하자. 이유는 없고 뮤지컬이니까 그냥 노래를 하자.”는 것과 같이 뜬금없고, 맥락도 없고, 노래도 안 좋은데 억지로 끼워 넣은 느낌이 강합니다.

 

물론 저도 최근의 K팝, K드라마, K영화처럼 우리나라 뮤지컬이 전세계를 호령할 날이 언젠가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일단 노래가 좋아야 합니다. 저는 캣츠 오리지널 팀 공연에서 메모리 (Memory)라는 노래 한 곡만 17만원 주고 듣고 와도 돈이 아깝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감동적인 공연 잘 보고 오겠습니다. 저와 가족들 모두 그 동안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을 톡톡히 하고 오겠습니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는 것 외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수다 보따리를 풀겠습니다. 이미 저에겐 잊지못할 2023년이 된 것 같습니다.

 

728x90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