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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엔지니어] 이라크와 두바이 출장 후기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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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2013년에 저는 도화엔지니어링 도시단지1부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해외사업을 전담으로 하고 있었고 당시에는 신규 사업으로 이라크 사업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신도시 개발사업이어서 토목, 전기, 건축, 도시계획 등 많은 분야의 직원들이 참여했던 대형 사업이었습니다. 저는 팀장급은 아니고 설계 총괄 매니저를 맡아 설계도서의 작성과 취합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2013년 2월경부터 저는 프로젝트관리전문가 자격증인 PMP 취득을 위해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고 시험 날짜도 4월 말경으로 신청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2013년 1월경부터는 퇴사 후 이직을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PMP 자격증을 취득하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이라크 출장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약 10일간의 일정이었고 출장 준비를 위해 또다시 살인적인 야근이 시작되었습니다. 시험 준비까지 병행하려니 잠을 하루에 3~4시간 이상 잘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출장을 다녀와서 시험까지 합격한 후 글을 써서 당시에 오토캐드 강좌를 연재하고 있었던 캐드앤그래픽스에 기고했던 글을 얼마 전에 우연히 읽었습니다. 정말 그 당시 저의 모든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글 쓰는 솜씨가 너무 형편없고, 투박하며, 너무 짧습니다. 하지만 30대 후반의 제가 어떤 마음으로 일하고 있었고, 어떤 생각으로 이라크에 갔으며, 어떻게 자격증을 취득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최대한 첨삭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보기에 불편한 곳은 아주 조금 손을 봤습니다. 몇 부에 걸쳐 연재될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정리해보겠습니다.

 


 

가기 싫었다. 죽어도 한국에서 죽고 싶었다. 몸부림치며 최선을 다해 저항하며 가기 싫었다. 이라크라니… 다른 곳도 아니고… 회사는 완강했고 문제 없을 거라는 이해할 수 없는 얘기만 했다. 사업과는 상관없이 이미 나는 이직을 생각하고 있다. 아내 역시 당장 회사를 옮기자고 했다. 우리는 왜 목숨을 걸면서 까지 일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 직업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직업이 싫어서 선택한 이 직업에서 목숨을 걸 것을 강요 당한다면 굳이 내가 여기에 있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난 내 목숨보다 가족과의 시간이 더 좋다. 모두가 다 그렇겠지만 난 더욱 심한 편이다.

 

결국 갔다. 가고야 말았다. 회사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당장 퇴직 의사를 밝혀도 인수인계 할 대상조차 없었다. 오직 혼자서 출장 준비를 했고 우리 팀에서 오직 혼자 왔다. 모든 설계 관련 업무는 내가 도맡아야 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극한의 공포. 이게 문제였다. 출발 몇 일 전에도 몇 십 명이 죽었고 다녀온 후에도 몇 십 명이 죽었다는 CNN 보도가 있었다.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악수하며 회의를 해야 했다. 물론 이라크 정부에서 안전을 책임져 준다고 해도 내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이라크 재건 사업. 현재 한화 건설과 건화 엔지니어링이 추진 중인 지역과 별도로 다른 곳에서 계약이 추진 중이다. 다른 자세한 사항은 업무상 비밀로 다룰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원래는 번역 및 통역 지원 업무를 일주일 정도 맡았는데 아예 발을 못 빼고 눌러 앉아버렸다. 팀에서 하던 사업들을 내려놓고 끌려 나오다시피 해서 이라크 사업 팀으로 들어왔다. 출장지에서 당초 일정보다 5일이 더 지연되어 대기 시간이 길어졌다. 최종 일정은 이랬다.

 

4월 7일 (일) 밤 11시 55분 인천공항 출발

4월 8일 (월) 두바이 공항 도착

4월 8일 (월)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 도착

4월 8일 (월) ~ 4월 12일 (금) 이라크 정부와 회의

4월 13일 (토) 자동차로 바스라 (Basrah)로 이동

4월 15일 (월) 바스라 주정부와 회의

4월 16일 (화) 두바이 공항 도착

4월 17일 (수) 인천 공항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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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서 돌아왔다. 다행히 죽을 뻔한 기억은 없었지만 매 순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장장 10일간의 여정이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이런 오지에서 일하는 모든 분들이 존경스럽다. 난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설계라는 직업을 택했다. 이런 일은 바라지 않았다. 설계가 진행되면 아예 상주하면서 해야 된다고 한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첨언 : 당시에는 이라크가 싫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퇴사 후 리비아로 발령 받아 가보니 이라크가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똑같이 위험한 곳이었고 내전 중이었지만, 리비아에서는 월급도 두 배나 많았고 회사에 대한 신뢰와 애정으로 인해 두렵기는커녕 도전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결국 회사와 제가 맞지 않아 생긴 문제였습니다.)

 

처음 바그다드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더운 날씨를 느낄 기분이 아니었다. 한 여름에는 섭씨 50도까지 올라간다는데 아직은 봄이라 25도 정도 된다. 서울과 시차는 약 6시간이다. 공항에서 기념으로 전경 사진을 하나 찍었다.

 

▲ 바그다드 공항에서 찍은 사진

이 사진을 찍고 다른 사람들에게 혼이 났다. 바그다드에서는 함부로 사진을 찍으면 안된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진을 찍지 못했다. 공항에는 경찰과 군인들이 많다. 미리 나와 대기 중인 자동차를 이용하여 호텔로 이동하면서 군인들에게 검문 검색을 10번 정도 받았다. 안전 지대라고 불리는 Green Zone 안에 호텔이 있고 Green Zone으로 진출입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렇게 검문 검색을 거쳐야 한다고 한다. 서있는 자동차들이 터지지나 않을까 걱정 많이 했다. 그래도 한 나라의 수도인데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다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거리 곳곳에는 장갑차와 탱크들, 군인들 뿐이다. 행인도 없고 건물들은 총알 구멍이 나 있거나 아예 폭격에 부서진 건물들이 많다. 가면서 신기한 조형물들과 건축물들을 보았는데 사진으로 남기지 못해 아쉽다. 구글 어스에서 대신 사진을 구했다.

 

▲ 승리의 손 (Hands of Victory) 조형물

먼저 승리의 손 (Hands of Victory)이다. 큰 규모에 입이 절로 벌어진다. 잠시 테러의 공포를 잊고 관광객 모드로 돌아갔다.

 

▲ 무명용사 기념비 (Unknown Soldier Monument)

 

우리 말로 직접 번역한 것인데 정식 명칭은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무슨 경기장인줄 알았다. 여느 경기장보다 훨씬 크다. 그래서 옆에 있던 터키인에게 무슨 경기장이냐고 물어봤더니 경기장이 아니고 기념비이며 후세인 집권 당시 군인들의 훈련장이자 군 본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드디어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정문에는 M60 기관총으로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

 

▲ 숙소인 알 라시드 호텔 (Al-Rasheed Hotel)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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