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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엔지니어] 바둑을 취미로 갖게 된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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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유일하게 취미로 삼고있는 게임이 바로 바둑입니다. 1997년 군대를 제대하고 나와보니 세상은 온통 스타크래프트 열풍이었습니다. PC방이든 집에서든 모든 놀이문화가 스타크래프트로 통합된 느낌이었습니다. 군대 가기 전에는 모두가 당구장에서 살다시피 했었는데 유행이 또 바뀐 것입니다. 당구도 잘하는 편은 아니었고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과 술 마시고 그저 당구나 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제대를 하고는 복학하기 전에 10개월 가량 시간이 남아서 뭘할까 고민하다가 아르바이트를 했었습니다. 아르바이트도 이것저것 해봤지만 예술의 전당에서 했던 아르바이트가 가장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 얘기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당시 제가 제대를 하고 보니 입대와 제대의 시간 차이 때문에 친구들과는 아직 제대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군대를 일찍 간 친구들은 먼저 복학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저보다 늦게 군대에 간 친구들은 아직 제대를 못했으니 자연스럽게 용돈이라도 벌게 되었습니다. 복학하고 나서 보니 그야말로 모두가 스타크래프트 열풍이었습니다. 다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정신 못차리고 PC방에서 살았습니다. 저도 스타크래프트를 친구들에게 배워봤습니다. 역시 저는 흥미도 없고, 재능도 없었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습니다.

 

저는 스타크래프트로 바뀐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당구는 잘 치지는 못해도 중간 정도 쳤으니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타크래프트 세상에서는 다같이 어울려서 PC방은 가야했고 게임을 하다 보면 가장 못하니 가장 먼저 패해서 시간이 많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두커니 남들 게임하는 것을 구경하다가 그것도 질려서 이것저것 다른 게임들을 구경하기 시작했고 그때 바둑이 눈에 띄었습니다. 디지털 세상에서 아날로그의 끝판왕 바둑이라니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생각해보면 디지털 세상에 가장 완벽하게 적응한 아날로그 게임이 역시 바둑이기도 했습니다. 무조건 만나서 둬야만 하는 게임인 줄 알았는데 컴퓨터만 있으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둘 수 있는 게임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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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는 바둑을 시작했고 친구들 중에 바둑 고수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찾고 보니 같은 과 동기들 중에 요즘 표현으로 '아싸'에 해당하는 조용한 친구 하나가 숨어있는 바둑 고수였습니다. 당시 7급 정도 두는 실력이었고 그 정도면 막 입문한 저에게는 신같은 존재였습니다. 일단 학과방에서 바둑판으로 바둑의 기초를 배우고 인터넷 바둑을 둘 때 뒤에서 훈수를 해주면서 배웠습니다. 집에 가서도 시간 날 때마다 한 판씩 두었고 바둑 관련 책들도 사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고수 친구에게 처음에는 9점을 깔고 두다가 점점 6점, 4점, 2점으로 접바둑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TV에서는 지상파에서 바둑을 비중있게 중계해주는 일이 많아서 거의 모든 중계를 챙겨봤습니다. 당시 바둑계는 조훈현 9단이 제자인 이창호 9단에게 밀려 왕좌의 자리를 내어준 지 얼마 되지 않았었고, 이미 이창호 9단은 신의 경지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인간계에서 보지 못했던 저 세상의 수들을 두었고, 완전히 다른 방식의 바둑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신의 한 수'라는 표현도 이창호 9단에서 비롯되었을 정도였습니다.

 

저의 바둑 실력이 날로 늘어 3급 정도 되었을 때 저는 취직을 해야 했습니다. 바둑을 좋아했지만 남들 스타크래프트 하듯이 잠을 안 자거나 공부를 게을리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동시 다발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습관을 바둑을 통해 배웠습니다. 요즘 표현으로는 멀티 태스킹 (Multitasking)이라고 하는 동시 작업을 저는 할 줄 몰랐었습니다. 한 번에 한 가지에만 집중해야 하는 스타일이었지만, 바둑을 통해서 멀티 태스킹이 가능해졌습니다. 바둑판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모두 관리해야 하고 한 수, 한 수가 가진 유불리를 계산하는 습관을 갖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상 생활에서도 모든 면에서 제가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취직을 하고는 바둑을 두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급기야 연애와 결혼까지 하게 되니 더더욱 바둑 둘 일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저의 바둑에 대한 관심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바둑 시합은 유튜브로 하이라이트를 빼놓지 않고 시청하고 있고, 주요 뉴스들은 모조리 꿰차고 있습니다. 이제 저의 실력은 5급도 안 되겠지만 초일류 기사들이 두는 바둑을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원래 지켜보는 것과 실제로 두는 실력은 다릅니다. 그래서 바둑 못두는 사람들이 꼭 훈수질을 하는 이유입니다. 실제로 둘 때는 안 보이던 것들이 옆에서 보고 있으면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둑은 우리 인생과 많이 닮아있고, 알게 모르게 우리 일상 속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포석(布石), 정석(定石),

실리(實利), 국면(局面), 타개(打開), 사활(死活), 묘수(妙手), 패착(敗着), 복기(復棋), 착수(着手), 승부수(勝負手) 등 모두 바둑 용어들이고, 뉴스와 책을 읽다 보면 항상 나오는 용어들입니다. 그리고 회사에서 보고서를 쓰거나 할 때도 자주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은 거의 모두가 바둑을 조금씩 둘줄 아시기 때문입니다. 바둑을 두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다 보니 바둑 용어가 자연스럽게 우리 일상 속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둑은 진정 우리의 삶과 세상 만물의 이치가 담겨있습니다. 시작하면 반드시 끝이 있고,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법을 알게 되며, 승패보다 승부 자체를 즐기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분야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고수(高手)와 하수(下手)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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