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작(酬酌)과 짐작(斟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을 꾸미려 들거나 꾸미는 행위 자체를 일컬어 ‘수작부리다’라고 하고, 어떤 상황의 판단이나 상대방의 의중을 헤아려 생각하는 것을 ‘짐작하다’라고 합니다. 수작과 짐작 두 단어 모두 술자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수작(酬酌)'은 술 따를 수(酬)와 술 따를 작(酌)이 합쳐진 단어로 옛날에 꼭 술자리에서 역모를 꾀하거나 작당모의를 꾸미는 일이 많아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짐작(斟酌)에서 짐(斟)은 술을 따르되 술잔을 가득 채우지 않는 일이고, 뒤의 작(酌)은 술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르는 동작을 말합니다. 술자리에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상대방의 의중을 떠보거나 헤아린다고 해서 나온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오래 전부터 술 문화가 우리의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갑자기 수작과 짐작의 사전적 정의와 어원에 대해 얘기를 꺼낸 이유는 제가 알게 된 경위가 너무 황당해서 기억에 확실하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들이 술자리에서 나왔고 한자의 뜻이 술 따르는 행위를 일컫는다는 것을 방송인 타일러 라쉬에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팟캐스트로 ‘김영철의 파워 FM’의 한 코너인 ‘진짜 미국식 영어’를 챙겨 들으며 영어 공부를 해왔습니다. 여기에 타일러 라쉬라는 미국인이 나오는데, 청취자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하는 우리말을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알려줍니다. 매일 공부하며 타일러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새삼 깨닫습니다.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코너나 강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한국인들이었고 직역만 해줄 뿐 어감이나 상황에 따른 분위기까지 완벽하게 우리말과 영어를 이해하고 가르치는 사람은 타일러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 가령 오늘 아침에 배운 표현을 예로 들면, ‘새치기 하지 마세요.’를 영어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묻는 청취자의 질문에 타일러는 단순히 ‘Don’t cut the line.’이라고 답해주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40년 넘게 ‘새치기 하지 마세요.’ = ‘Don’t cut the line.’이라고 배웠고 그렇게 외웠습니다. 그런데 타일러의 설명은 틀린 표현은 아니고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지만 새치기하는 사람들이 비상식적이거나 대화가 안 통하는 경우들이 더 많은데 너무 강하게 얘기하면 싸움밖에 더 하겠느냐는 논리입니다. 그러니 ‘여기 줄 서야 해요.’ 정도의 의미로 ‘There is a line.’과 같이 부드럽게 얘기하는 것이 더 미국식 영어라고 설명합니다. 타일러의 설명을 매일 들으면서 매일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타일러가 언젠가 다른 설명을 하다가 우연히 수작과 짐작에 대해서 설명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위에서 제가 설명한 대로 그대로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그런가 하고 팟캐스트를 잠시 멈추고 사전을 찾아보니 정말 완벽하게 정확한 설명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미국인은 뭐하는 사람인가 싶었습니다. 나보다 한국어를 더 잘하는 미국인이라니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반대로 저는 영어를 오랫동안 공부하면서 타일러가 한국어를 공부한 만큼 공부했는지,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지 매일 반성하게 됩니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타일러의 언어 능력만큼은 정말 뛰어난 것 같습니다. 단어와 표현이 가진 어감과 숨어있는 속뜻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 사용해야 하는지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적도 있었습니다. ‘눈치를 보다’라는 표현을 영어로 어떻게 말하는지에 대해 타일러는 그런 표현이 없으니까 일부러 만들어서 말하지 말라고 설명했습니다. 사실 저도 ‘눈치를 보다’라는 표현이 영어에 없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에둘러 비슷하게 표현하기 위해‘conscious’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타일러는 언어를 배우려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화까지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미국에는 우리 문화에서 의미하는 눈치를 본다는 문화 자체가 없으니 그것조차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비슷한 표현을 아무리 만들어 봐도 문화 자체가 없으니까 우리말의 어감과 일치하는 표현을 만들어 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입니다. 타일러는 언어 능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본인만의 신념도 확고한 캐릭터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타일러의 대한민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는 여느 한국인보다 더 뛰어납니다. 사실 우리도 우리 문화에 대해 객관화해서 깊이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냥 아는 것이고, 저절로 체득되는 것일뿐, 왜 이런 문화가 탄생되었고 어떤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 문화인지 이해해가면서 배운 것이 아닌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끄럽지만 타일러의 ‘진짜 미국식 영어’를 통해 우리말과 우리 문화를 다시 배우고 있는 느낌입니다.더불어 미국 문화에 대한 설명을 통해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어서 더 좋습니다. 덕분에 시야도 넓어지고 언어가 가진 어감, 억양, 맥락에 대해 깊이 생각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최근에 타일러는 기후 변화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활동도 겸하고 있어서 다방면에 걸쳐 관심과 전문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외교학을 공부했다고 하는 타일러는 분명 인류학자나 언어학자로서의 자질도 충분해 보이니 앞으로의 활동도 기대해 볼만 합니다. 저도 멀리서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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