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킹(hiking)과 트레킹(trekking)의 차이를 아시나요? 하이킹은 한양도성길이나 서울 둘레길처럼 정해진 코스를 따라 산이나 자연을 즐기는 활동을 말하고, 트레킹은 정해진 코스도 없고 교통수단도 없는 곳에서 하는 도보 여행을 의미합니다. 네팔의 산악지역을 걷는 것은 하이킹일 수도 있고 트레킹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코스가 정해져 있는 산악지역이었다면 하이킹입니다. 교통수단이 없는 아마존의 부족마을을 걸어서 가봤다면 트레킹입니다. 그런데 아마존 부족마을 체험 둘레길 코스를 만들어서 가봤다면 하이킹이라고 해야 합니다.
오늘 저는 한양도성길을 하이킹 다녀온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서울 둘레길을 걷기 전에 저는 딸 아이와 함께 한양도성길을 완주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우리 가족이 어딘가 서울 시내에 놀러 나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한양도성길 지도를 보고 아이에게 제안했고 아이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딸 아이는 나중에 크게 후회했지만 어쨌든 걷는 동안은 재미있고 행복하게 걸었습니다. 와이프는 배드민턴에 올인 중이었고, 그 때문에 무릎도 좋지 않아서 산행은 삼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당시에 서울 둘레길이라는 존재를 전혀 몰랐었고, 한양도성길이 힘든지 어떤지 전혀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로 출발했습니다. 2019년이면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5월초 황금 연휴여서 집에 있으면 와이프와 딸이 동시에 스트레스를 받게 될 게 뻔했기 때문에 아이와 뭔가를 하려고 마음은 먹고 있었는데 좋은 기회였습니다. 차를 몰고 어딘가를 가려면 미리 몇 개월 전부터 부지런을 떨었어야 했지만 그러지도 못했고 한양도성길은 일단 가까워서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도와 생수병 몇 개 들고 지하철을 타고 길을 나섰습니다. 지도를 보니 한양도성길 앱도 있더군요. 앱도 설치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습니다. 총 3일에 걸쳐서 걸었는데, 첫 날은 제2구간을 선택해서 4호선 한성대역으로 향했습니다. 혜화문에서 출발하기로 한 것인데, 제가 여기를 고른 이유는 제가 나온 대학교 근처라서 4년간 지나다닌 길이었기 때문에 익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동대문에서 시작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동대문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은 이유는 완주 후 스탬프를 다 찍었다는 인증을 하면 기념품으로 배지를 주는 곳이 바로 4호선 동대문역사공원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완주 배지를 주는 곳이 총 4곳이 있는데 바로 근처에 있는 줄도 모르고 익숙하고 아는 곳부터 출발했으니 조금 불편을 겪었습니다.하지만 사실 여행의 묘미는 이런 곳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법을 배우게 되니까요. 어차피 여행이란 잘 짜여진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불확실성을 즐기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제2구간인 낙산구간의 혜화문에서 출발하자마자, 도성길을 따라 걷다 보니 평생 서울에서 살면서 처음 보는 곳들이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신기했고, 예쁘고, 고즈넉한 분위기의 동네들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낙산공원을 처음 봤는데 사람도 많았고 경치가 예뻤습니다. 그렇게 두어 시간 걸었고 동대문쪽으로 내려와 제3구간 흥인지문 구간에 들어서서 광희문에 도착했을 때 아이가 힘들다고 칭얼대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멈추고 저는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모조리 품에 안겨주고 먹여줬습니다. 사이다, 아이스크림, 우동 등을 사줬고 첫날부터 무리하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습니다.첫날에 이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집에 가서도 저녁에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삼겹살을 구워 줬습니다. 그래야 내일 또 갈 수 있으니까요. 뭔가를 해냈을 때 보상은 확실하고 시원하게 해줘야 한다는 게 제 신념입니다.
다음날 아침에 우리는 광희문으로 향했습니다. 제3구간은 고저차도 별로 없고 걷기 쉬운 구간이었습니다.장충체육관에 도착해서 제4구간 목멱(남산)구간에 접어들자 곧바로 신라호텔 뒤쪽으로 오르막길이 시작되었습니다. 참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힘은 많이 드는데, 경치와 풍경은 또 어찌나 예쁘던지요. 한양도성길은 정말 대박이라는 생각을 이때 처음 해봤습니다. 그렇게 남산N타워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서서 딸 아이와 저는 좌절하여 한참 쉬었습니다. 이미 충분히 오르막을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진짜 고통의 계단이 시작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정말 남산 구간의 계단은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둘이서 계단 중간중간에 널브러져서 쉬고 있으면 어떤 분은 우리 사이로 뛰어서 올라가시기도 하더군요. 저도 체력이 많이 약해져서 나이와 게으름을 탓하며 올라갔습니다. 정말 한참을 올라가니 드디어 남산N타워가 나왔습니다. 인증샷 실컷 찍고 아이에게 아이스크림도 사줬습니다. 저는 시원하게 콜라 한잔 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오르면서 참을 수 있었던 것은 계속 주문처럼 외던 단어 덕분이었습니다. 바로 ‘남산 돈까스’였습니다. 점심으로 남산 돈까스를 먹기로 하고 걷기 시작했기 때문에 숨이 목까지 차올라 힘들어도 남산 돈까스를 머리에 떠올리며 견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내려왔고, 다른 것보다 일단 남산 돈까스부터 먹었습니다. 정말 얼마나 맛있던지요. 평소에 먹던 것보다 몇 백 배나 더 맛있었습니다. 그리고 제5구간 숭례문구간으로 접어들었고 남대문 시장에서 딸 아이에게 멋진 어린이용 등산화를 사줬습니다.남대문 시장을 구경하면서 길거리에서 잔치국수도 사먹었습니다. 좀 더 걷다가 돈의문 터 쯤에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세번째는 아이가 힘들어 해서 하루 쉬었다가 갔습니다. 1일차는 약 4Km 정도를 걸었고, 2일차는 약 8Km 정도를 걸었더니 힘들어 하더군요. 어쨌든 3일차에는 남은 거리가 약 10Km 정도여서 중간에 끊고 돌아오기가 애매한 상황이었습니다. 아이의 상태를 보고 결정하기로 하고 일단 나섰습니다. 당연히 절대로 무리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고요. 서대문역 돈의문 터에서 출발해서 인왕산을 올랐습니다. 그날 저는 서울에 40년 넘게 살면서 인왕산을 처음 가봤습니다. 뭐 하느라 그리 바빴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왕산에서 바라본 서울의 모습은 정말 기가 막히게 멋있었습니다. 힘은 좀 들었지만 도성길을 따라 걷는 길에서 본 경치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저에게 서울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산을 하나 고르라면 인왕산을 꼽을 정도로 너무 좋았습니다. 아이와 사진도 몇 백장 찍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인왕산을 뒤로하고 창의문에 다다르니 윤동주 시인의 기념관이 보였습니다. 윤동주 시인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기념관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살았다는 것에 많이 반성했던 것 같습니다. 그날은 복장도 추레하고 체력적으로도 힘든 상태라 다음에 제대로 가보고 싶어서 일단 패스했습니다. 창의문 근처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나니 아이가 집에 가자고 조르더군요. 이제 북악산 하나만 넘으면 한양도성길을 완주할 수 있는데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욕심을 좀 부렸습니다. 오늘로 끝내자고 아이를 설득했습니다. 아이와 잠시 실랑이를 하다가 ‘업어주기 이용권 3회’로 합의를 보고 북악산을 올랐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북악산이 그렇게 힘든 줄 알았다면 저도 고민하지 않고 집으로 갔을 것 같습니다. 전혀 사전 지식 없이 올랐는데 계단의 경사가 정말 절벽처럼 가팔랐습니다. 거기에 아이가 ‘업어주기 이용권 3회’를 연달아 쓰면서 저는 두 배로 힘들었습니다. 아이가 그때는 체격이 작아서 망정이지 지금과 같았으면 저는 그런 합의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북악산의 모습은 정말 예쁜데 2019년 당시에는 완전 개방되기 전이어서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었습니다. 게다가 청와대가 보여서인지 풍경을 가리기도 해놓아서 좀 아쉬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제6구간 인왕산 구간과 제1구간 백악 구간을 하루에 다 마쳤습니다. 그런데 왜 제1구간은 북악산 구간이 아니고 백악 구간일까요?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첫날 출발했던 혜화문으로 내려와서 우리는 체력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로 동대문역사공원 역으로 향했습니다. 완주 배지를 받기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했습니다. 스탬프는 총 4곳에서 찍을 수 있었고 우리는 열심히 스탬프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완주 배지를 받았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어찌나 기분 좋고 후련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인왕산과 북악산을 하루에 다 오르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원래 등산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모르겠지만 저같이 그냥 가끔 오르는 분들에게는 1일 1산을 권해 드립니다. 그래야 더 자세히 볼 수 있고, 그만큼 더 산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봄이 되고 날이 풀리면 저는 중학교에 올라가는 딸 아이 없이 주말에 혼자서 한양도성길과 서울 둘레길을 천천히 돌아볼 생각입니다. 여러분들도 엘리베이터로 오르는 비싼 전망대 찾지 마시고 한양도성길과 서울 둘레길에서 서울의 몰랐던 모습을 감상하시길 추천 드립니다. 웬만한 해외여행보다 더 멋있고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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