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휴대폰 케이스를 주문 제작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핸드폰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뛰어난 것이 아닌 저만의 독특한 디자인과 문구를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앱으로 케이스에 사용자가 직접 디자인을 선택할 수 있고, 원하는 문구를 넣어주기도 합니다. 현재 휴대폰과 케이스는 모두 4년이 넘었습니다. 4년 전 핸드폰을 바꾸면서 케이스 주문을 할 때, 디자인은 제가 태어난 달의 별자리인 물병자리 (Aquarius)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문구는 당시 책에서 봤던 좋은 글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선택한 글귀는 조선시대 광해군 8년 과거시험 기출문제로 알려진 “섣달 그믐밤의 쓸쓸함, 까닭은 무엇인가”입니다. 처음 이 문장을 접하고 정말 감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일단 과거시험이 어렵다는 점은 잘 알고 있었지만 어떤 식으로 문제가 출제되는지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시제 (試題)를 출제하면 그 주제에 맞게 시를 쓰는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거의 논술 시험이었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오래 전 조선시대 사람들도 겨울 밤에 우리와 똑같이 쓸쓸함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살기가 어려웠던 그 시절에도 낭만과 여유라는 것이 있었나 봅니다. 세월이 변해도 사람 사는 것은 다 똑 같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만약 제가 광해군 8년, 즉 1616년경에 과거시험을 봤다면 어떻게 답을 했을지 생각해봤습니다. 휴대폰 케이스로 문구를 새겨서 가지고 다니니 항상 제 옆에 두고 가끔씩 생각해 보곤 합니다. 물론 먹과 벼루를 가지고 붓으로 쓰는 것은 할 수도 없고 지금의 문법과 어투, 그리고 현대에 사는 제 생각으로 답을 하면 어떨까 궁금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생각만 해봤지 글로 써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과거시험에 임하는 자세로 키보드를 이용하긴 하지만 저만의 답을 일필휘지 (一筆揮之) 해보겠습니다. 어차피 정답이 있는 문제도 아니고 저의 글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습니다. 마치 제가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가서 시험을 치르는 심정으로 글을 써보겠습니다.
출제 문제 : “섣달 그믐밤의 쓸쓸함, 까닭은 무엇인가”
출제 일시 : 1616년 어느 날 (광해군 8년)
답안 작성자 : 孟英完
첫째, 인생 (人生)이 무상 (無常)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느낌의 정도는 저마다 각자의 나이와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어릴 때는 세상을 모르니 인생이 어떠한지 생각하지 않지만, 나이를 먹으며 세상을 조금씩 알게 되면 인생이 덧없음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섣달 그믐밤은 잠시 후면 또 한 살을 먹게 되니 지난 1년간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 보며 후회도 하고, 반성도 하기 좋은 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쁘고 좋은 일보다 좋지 않은 일들에 대한 기억이 더 오래 남습니다. 그러한 미련들의 총합이 결국 우리네 인생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러 실패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 보고 끝내 극복해내는 것이 곧 인생인 듯 합니다. 또한 누군가는 1년이 아닌 10년을 되돌아보기도 합니다. 나이가 9로 끝나는 이들은 조금 후면 나이대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특히 블혹 (不惑), 지천명 (知天命), 이순 (耳順)의 나이를 바라보는 이들은 지난 10년을 되돌아 보기도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세월에 대한 불안감도 느낄 것입니다. 그러니 각자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으나 섣달 그믐밤에는 모두가 인생이 무상하고, 세월이 덧없음을 똑같이 느끼게 됩니다.
둘째, ‘쓸쓸함’은 많은 감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섣달 그믐밤에 우리는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외로움, 괴로움, 고독함, 공허함, 허전함, 허무함, 슬픔, 그리움, 우울함, 아쉬움 등의 많은 감정들을 ‘쓸쓸함’이라는 감정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쓸쓸함’도 엄연히 하나의 감정이지만 우리가 표현할 때는 흔히 많은 감정들을 합쳐서 담아내고 있습니다. 섣달 그믐밤에 누군가는 외로움을 느끼며 ‘쓸쓸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슬퍼하며 ‘쓸쓸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이들이 그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 그믐밤에 ‘쓸쓸함’이라는 말로 많은 감정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또 하루가, 또 한 해가 가는 것에 대한 회한,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막연함과 두려움 등의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합쳐져 ‘쓸쓸함’으로 감정을 토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지금은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세상이므로 잘 모르시겠지만, 우리 몸의 호르몬 변화라는 과학적인 원인 때문입니다.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은 뇌의 시냅스에서 분비되는 신경 전달 물질로 감정 조절, 식욕, 수면 등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세로토닌이 많이 분비되면 기분이 좋아지고, 적게 분비되면 기분이 우울해집니다. 그런데 이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은 일조량에 비례합니다. 햇빛을 많이 받으면 분비량이 증가하고, 어두운 상태에서는 분비량이 감소합니다. 밤이 되면 왠지 모르게 쓸쓸해지고 감성적으로 변하는 것은 모두 세르토닌 때문입니다. 밤에는 햇빛을 받을 수 없으니 세로토닌 분비량이 줄어들면서 우울함, 불안감 등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밤에 쓸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넷째, ‘시절이 하 수상 (殊常)’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저의 말이 이해가 안 되실 것입니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임금의 선친인 선조의 무능으로 인해 국가가 피폐해졌고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습니다. 외교와 국방에서 후일을 도모하지 못하여 임진왜란 (壬辰倭亂)과 정유재란 (丁酉再亂)으로 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으나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 우리 역사상 가장 어처구니 없는 임금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임금인 이혼(李琿, 광해군의 본명)을 몰아내고 반정 (反正)을 통해 다음에 왕위에 오르게 될 인조는 선조만큼 무능한 아들입니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배척하고 친명배금 (親明排金) 정책으로 인해 후금 세력이 병자호란 (丙子胡亂)을 일으켰고, 결국 인조는 항복하고 삼궤구고두례 (三跪九叩頭禮)를 행하게 되어 ‘삼전도의 굴욕’을 후세에 치욕스러운 역사로 남기게 됩니다. 이때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던 김상헌이 볼모로 잡혀가면서 남긴 시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입니다. 여기에서 ‘시절이 하 수상하다’라는 표현이 후세에 전해지고 유명해집니다. 선조와 인조라는 역대 최악의 군주 사이에서 광해군과 같은 뛰어난 군주는 무너진 나라를 재건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통탄할 일입니다. 백성들은 이미 전쟁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고, 전쟁이 끝나도 굶어 죽거나 전염병으로 죽고 있으니 집집마다 죽은 이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실로 쓸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통곡하는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로 ‘시절이 하 수상’하니 어찌 쓸쓸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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