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회사에서 하루 8시간, 일주일에 40시간, 1년에 2,080시간 동안 일을 합니다. 최근 정부에서 주 69시간까지 연장근무를 허용하겠다는 발표가 있었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우리는 주 40시간 일을 합니다. 하루에 8시간 근무라고 딱 8시간만 회사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점심시간도 있고 상사가 퇴근을 하지 않으니 이른바 '눈치 야근'도 예의상 30분에서 1시간씩 하는 회사들도 많습니다. 식구들 입장에서 보면 출퇴근 시간까지 있으니 직장인이 집에서 나가서 다시 들어오기까지 거리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저같은 경우 12시간 반 정도 걸립니다. 출근은 8시, 퇴근은 5시입니다. 아침에 남들보다 1시간 정도 일찍 출근하기 위해 6시쯤 집을 나서서 5시에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오후 6시 반 정도 됩니다. 출퇴근 시간이 약 2시간 반 정도 소요됩니다. 회사에 머무는 시간은 점심시간과 이른 출근으로 10시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집에서는 잠을 자는 6~7시간 정도를 제외하면 최대 5시간 정도 되고 저녁 먹고, 씻고, 운동하는 시간을 빼면 3시간 정도가 남습니다. 가족들과 저녁 시간에 오롯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3시간 정도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회식을 하거나 친구들과의 약속으로 저녁을 먹고 들어가는 날은 가족들과는 뭔가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이만큼 우리는 회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최대한 단순화하면 하루에 절반은 회사에서 보내고, 1/4 정도는 잠을 자고, 나머지 1/4 정도만 가족과 함께 합니다. 그러니 직장에서 문제가 생기면 스트레스가 크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일하면서 생기는 스트레스는 그나마 참을 수 있으나, 사람 사이에 생긴 갈등은 마음까지 다칠 수 있어 내상이 크게 느껴집니다. 그 이유가 바로 좋던 싫던 하루에 절반을 회사에 투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1/4만 가족들과 함께 한다고 스트레스가 약하거나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가족들 중 누군가 아프거나, 가족들과 불화가 생기면 인생에서 그만큼 힘든 일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저는 그 두가지를 놓고 어떤 것이 더 크다거나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에 절반을 투자해서 일하는 공간인 회사에서, 하루에 가족들보다 더 오래 함께 지내는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대부분의 사회적인 관계들은 원만합니다. 더 정확히는 원만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직장 생활에서는 시작과 동시에 갑과 을의 관계로 종속되기 때문입니다. 회사 내에서 직급, 호봉, 나이, 경력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갑과 을이 정해집니다. 게다가 대한민국에서는 나이가 많으면 일단 갑의 위치에 서게 되는 독특한 문화로 인해 상대방이 동의를 하건 말건 일단 말부터 놓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보다 윗 세대들의 이런 문화는 존중하고 이해합니다. 그분들이 만든 문화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의 세대에서 나이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는 문화를 끊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안 되더라도 계속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면서부터 부하 직원들에게 반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저와 띠동갑인 직원들, 20살 이상 차이가 나는 직원들에게도 반말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적응이 안 되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런 말들을 합니다. '너무 정이 없어 보인다'라거나 '족보가 꼬인다'라거나 '보기 좋지 않다'라는 반응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반응들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낯선 것을 보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부하직원들에게 반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첫째,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존중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존중해주고, 대우해주며, 신뢰하고 있으니 저에게 뭔가를 보여 달라는 무언의 시그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뢰와 존중만으로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할 기회 자체를 차단하고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싶었습니다. 둘째,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직장에서 친해진 직원들끼리 술자리에 가면 '형, 동생'하며 웃고 떠드는 직원들을 많이 봅니다. 그들은 술자리에서만 그런다고 말하지만, 정말 업무 중에 '형, 동생'을 위해 봐준 적이 없을까요? 그럴리가 없습니다. 일을 하면서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되는 것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셋째, 미래의 리더를 양성하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신입사원이라도 언제까지 막내만 할 것이 아닙니다. 일하면서 어떤 리더십을 갖춰야 하는지 충분히 존중받는 조직 안에서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안정된 느낌을 받으며 일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 업무를 습득하는 시간도 빨라지고 고참들에게 질문하는 내용의 퀄리티도 향상됩니다. 넷째,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과거처럼 수직적으로 탑다운 (Top Down) 방식이 아니라, 바텀업 (Bottom Up) 방식의 조직 문화와 업무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정이 없어 보여 싫다'는 반응도 이해는 하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한국인만의 독특한 정서인 '정'은 반말과 존댓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갑자기 말을 놓으며 '정'을 느끼게 하면 그 사람이 갑자기 따뜻함과 다정함을 느끼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저 갑의 위치를 얼른 선점해서 수족으로 부리기 위함,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하루에 절반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이니 각자의 가족과 개인사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회식이나 식사 중 수다의 주제로 자주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개인적인 대소사에 대한 배려만큼 '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눈치보지 않고 가족들과의 대소사를 먼저 챙기는 문화를 만들면 그게 '정'입니다.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으로 결원이 생겼으니 티나지 않게 십시일반으로 동료들이 나눠서 일을 처리해주는 것이 '정'입니다. 그렇지 않고 집에 무슨 일이 생겼는데 눈치 보여서 말을 못하고 끙끙대는 분위기, 또는 저녁에 가족과 약속이 있는데 어쩔 수 없이 야근을 해야 하는 분위기 속에서 반말 한다고 없던 '정'이 갑자기 생겨나는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회사에서는 사람대 사람으로 일해야 합니다. '부하 직원'이라는 표현도 올드하다는 것이 최근의 트렌드라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대체할만한 용어를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일단 '경력이 3년 이하'인 직원들도 사람이고 직장에서 엄연히 소중한 인적 자원입니다. 최근 대기업 총수들은 신입 직원들과 소통하려고 많이 노력하는 편입니다. 하물며 매일 얼굴 보는 임원들과 신입 사원들은 얼마나 소통하고 있을까요? 얘기 몇 마디 나눈다고 소통은 아닐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소통은 서로 공감하는 것입니다. 기업들은 너도나도 수직적인 조직문화에서 수평적인 조직문화로 탈바꿈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적응하고 바뀌겠지만 아직은 시간이 많이 필요해 보입니다. 제가 직장생활 22년간 모든 이들에게 존댓말 했던 노력이 사회 전체를 바꾼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22년 전의 제 생각과 그 동안의 노력들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에 나름 뿌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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