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딸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에 올라가자마자 갑자기 중대 선언을 했습니다. 살면서 들어보지도 못했던 서울시 어린이 기자에 도전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선가 우연히 서울시 어린이 기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저와 아내에게 해보고 싶다고 말한 것입니다. 허락을 맡기 위해 말한 것이 아니고 거의 통보에 가까웠습니다. 당황스러운 우리는 관련 정보를 찾아보니 괜찮아 보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아직 어리고 한없이 부족해 보이는 우리 딸아이가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섰습니다. 하지만 저는 검단산과 서울 둘레길에서 보여준 딸아이의 인내심과 결단력을 믿기로 했고 무조건 최우선적으로 돕기로 했습니다. 딸아이가 직접 어린이 기자 모집에 신청서를 냈고 아내와 저는 개인정보와 초상권 등 각종 동의서만 써준 게 전부였습니다. 며칠 지나고 서울시 어린이 기자에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직 활동을 시작한 것도 아닌데 딸아이가 너무 대견해 보이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코로나 시국이어서 기자증과 임명식은 온라인으로 진행됐고, 오세훈 서울시장과 신입 어린이 기자들이 함께 행사를 치렀습니다.
당시에는 기자가 되고 나서 뭘 해야 할지 정확히 잘 몰랐습니다. 딸아이는 지금까지 어린이 기자들이 쓴 글들을 모조리 읽기 시작했고 나름 분석도 하고 나서 저와 아내에게 자세히 설명을 해줬습니다. 서울시 어린이 기자는 서울을 홍보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고, 서울과 관련된 것들을 찾아 취재한 후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 주된 활동이라고 했습니다. 가끔씩 자유 주제로 글을 쓸 수도 있고, 지정 주제로 주어진 주제에 맞게 글을 쓰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1년에 몇 번은 어린이 기자들 중에 선발된 소수의 인원이 연예인이나 유명인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기회도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작성한 기사들 중 우수 기사로 선정되면 온라인과 종이신문에 실릴 수도 있다고 하고, 최종 우수 기자들에게는 서울시장 표창장이 수여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듣고는 우리끼리 어렵겠지만 서울시장 표창장을 받으면 좋겠다고 어렴풋이 생각만 했었습니다.
처음에는 딸아이가 어떤 주제로 글을 쓸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라서 갈 수 있는 곳도 한정되어 있었고, 서울시 내에서 개최되는 행사도 많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어린이 기자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는 한계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 딸아이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일단 서울 둘레길은 절반 이상 걸었으니 장기 프로젝트로 나중에 한꺼번에 정리해서 쓰기로 하고 서울시와 관련된 취재 거리를 찾아봤습니다. 제가 아빠 찬스로 글을 좀 써주는 것은 어떤지 물었다가 아이에게 되려 혼이 났습니다. 그렇게 하면 기자를 하는 의미가 없어진다고 하니 잠깐이라도 그런 생각을 했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서울시 안에 있는 박물관, 미술관, 전시관 등 중에 다른 기자들의 기사와 중복되지 않는 곳들을 가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검색을 해서 리스트로 작성을 했고 아이는 리스트를 보고 중복 여부를 체크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주말과 휴일마다 서울 둘레길을 걷고 서울시 안에 있는 박물관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다녀와서는 딸아이가 사진을 정리해서 직접 기사로 작성해서 업로드한 뒤에 쉬곤 했습니다.
그렇게 1년쯤 활동을 열심히 한 덕분에 6학년 올라갈 때 서울시 어린이 기자 신분이 1년 더 연장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주 휴일에 여전히 서울 둘레길과 박물관 탐방을 했습니다. 딸아이도 꾸준히 취재 후 기사를 작성했고 저는 길 안내 정도만 해줬고, 때로는 박물관 같은 곳에서 모르는 부분을 설명해주는 정도만 도와줬습니다. 2022년 여름에는 유명한 영화감독인 팀 버튼 감독이 전시회로 내한했을 때 어린이 기자들에게 인터뷰 기회를 줬고, 딸아이가 신청해서 선정되어 팀 버튼 감독을 만나 함께 전시회장도 둘러보고 인터뷰도 했습니다. 당시 딸아이는 팀 버튼 감독을 만나기 2주 전부터 하루에 1~2편씩 팀 버튼 감독의 영화를 모조리 다 보고 인터뷰에 갔을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얼마나 대견한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누가 시켰다면 그렇게 못했을 것입니다. 정말 열심히 활동했고 꾸준했습니다. 6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드디어 서울 둘레길을 완주하게 되어 3년간의 기록을 정리해서 기사로 올렸더니 우수 기사로 선정되었습니다. 저희는 우수 기사가 될 줄 알고 있었습니다. 정말 방대한 양의 기록과 데이터를 일찌감치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수 기사는 2년간 10~20 차례 가량 선정되었기 때문에 놀라울 것은 없었지만, 서울 둘레길 관련 기사는 정말 제가 봐도 역대급이었습니다.
그렇게 2년간 활동을 마무리하고 그렇게 끝나는구나 했는데, 아이가 겨울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서울시 어린이 기자들 중 우수 기자들 12명을 선정해서 서울시장 표창장을 수여하는데 딸아이가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눈물 나도록 기뻤습니다. 좋은 상을 받아서라기보다 딸아이가 2년간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되어 너무나 다행이라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평생 잊지 못할 우리 가족만의 추억을 갖게 된 것도 기뻤고, 딸아이의 경력에 큰 방점을 찍게 되었으므로 앞으로 무엇을 하든 도움이 될 것이므로 더 행복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본인이 원하는 일을 오랫동안 묵묵히 한 것에 대해 보상을 받는 즐거움과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좋았습니다. 이와 같이 작든 크든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여 노력한 일이 성공한 경험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시장 표창장을 받고 이제 중학교에 올라간 딸아이를 바라보며 저는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 땰은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잘한다는 것”입니다. 자꾸만 양가 할머니들과 아이 엄마가 강제로, 억지로, 조급하게 공부를 강요하고 있는데,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할 말은 많지만 집안의 평화를 위해 일단 참기로 했습니다. 제 딸은 그냥 놔두면 됩니다. 혼자서 자신의 앞길을 개척해가며 잘 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그저 딸아이가 가는 길에 말동무나 해주고 쉬고 싶을 때 같이 놀아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원하지 않는 것을 강요하면 더 이상 아이는 부모에게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가 묻는 질문에 답을 잘하는 부모가 되고 싶고, 반드시 딸아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게 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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