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차례 밝혔듯이, 저는 토목 엔지니어로서 태양광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술팀 팀장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본래의 기술 업무에 태양광 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는 법인 관리 업무까지 떠맡아 일하고 있습니다. 법인 관리 업무가 이렇게 다양하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인지 이전에는 몰랐습니다. 조직의 축소로 인해 자의와 타의로 팀 구성원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혼자서 감당해야 할 업무가 많아졌습니다. 일에 푹 파묻혀 치여 살다 보니 초심을 잃을 것 같아서 가끔은 불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정체성에 혼란을 조금씩 느끼는 요즘이기도 합니다.
역시 수차례 말했듯이, 저는 저의 정체성이 토목 엔지니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성향, 철학, 취향, 성격 등 모두 뼛속까지 엔지니어라고 생각하고 살았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 제가 2014년에 일본 현장에 발령 받아서 건설사업관리 단장으로 일했을 때가 바로 태양광 발전소 건설 현장이었습니다. 토목 엔지니어가 발전소 현장을 감독하는 것이 이례적인 일이었고, 게다가 일본에서 일본 시공사가 건설하는 모습을 감독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어서 기존 사례를 받아보거나 알아볼 수도 없는 초유의 경험이었습니다. 우선 저는 태양광에 대해 공부해야 했고, 동시에 전기라는 물질, 물리적 현상, 역사 등에 관해서도 공부해야 했습니다. 닥치는 대로 찾아보고, 읽어보고, 공부해봤지만 전자기학이라는 학문이 너무나 생소해서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태양광과 전기 외에 전력 산업 전반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했습니다. 에너지 분야는 크게 학문적인 측면과 산업적인 측면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전력 및 에너지 산업 전반에 걸쳐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모두 완벽하게 이해하기에 불가능할 만큼 공부할 양이 많았지만, 나름 열심히 공부했고,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일본 태양광 발전사업에서 바라본 세계 에너지 전쟁 (World Energy War Watching Through Photovoltaic Power Generation Projects in Japan)”이라는 제목으로 토목학회지에 기고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엔지니어로서 일종의 사명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화 되기 전이었지만, 2014년 당시 선진국들이 주도해서 인류가 어떤 대응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자 저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제가 태양광 발전소 건설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인류에 작게나마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재생에너지, 특히 태양광 발전사업이 기후 변화에 대응하고 인류에 기여하는 엔지니어로서의 일종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본격적으로 태양광 사업을 하기 위해 이직을 하면서 면접 때 대표님께서 “왜 토목 엔지니어가 태양광 사업을 하려고 하나요?”라는 질문에 정말 토씨 하나 빼지 않고 “태양광 발전사업이 기후 변화에 대응하고 인류에 기여하는 엔지니어로서의 일종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더니 크게 웃으셨습니다. 그런 게 어딨냐면서 말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대표님 입장에서는 신입도 아니고 경력직 지원자가 교과서 같은 답변을 하니 그러셨던 것 같은데,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진심으로 그렇습니다. 사실 돈만 놓고 보면 저는 이직하면서 연봉이 절반 가까이 낮아졌으니 ‘엔지니어로서의 사명감’이 없이는 버티기 힘듭니다. 같은 말이라도 좀 유머스럽게 답변했어야 하나 하고 반성은 하고 있지만 제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심지어 요즘은 내가 여전히 토목 엔지니어가 맞나 싶을 정도로 토목 분야와는 거리를 두고 있어서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고향 같은 느낌이 점점 옅어지고 있어서 고민입니다. 그래도 아직은 토목 엔지니어는 저의 정체성이자 삶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안타깝지만 최근 몇년간 건설경기 불황으로 크고 작은 건설사들이 태양광과 풍력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다들 돈 냄새만 맡았을 뿐 기후 위기에 대한 절실함과 철학을 가지고 뛰어든 것 같지 않습니다. 왠지 깨끗한 이미지와 허울만을 좇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제 자신이 너무 순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치열한 비즈니스 사회에서 저처럼 순박하게 살아서는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인 줄 잘 알면서도 고쳐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50년 가까이 그렇게 살았으니 아마 앞으로도 고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지럽고 치열한 세상이지만 걔 중에는 저같이 세상 물정 모르고 인류를 생각하고 원칙을 중시하는 엔지니어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어디 한 번 버틸 때까지 버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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