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중순 그렇게 우리는 천신만고 끝에 튀니지로 탈출했고 귀국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20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서 탈출 기념으로 오랜만에 술 한잔 했습니다. 전쟁중인 리비아와는 달리 튀니지는 너무나 평화롭고 지중해 기후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살면서 튀지니를 언제 와보겠냐며 택시를 타고 한두 곳 둘러봤습니다. 사실 저는 리비아에 갈 때 사진 한 장을 핸드폰에 담아서 떠났었습니다. 바로 저희 아버지가 1984년에 리비아 벵가지에서 대수로 공사에 참여했던 건설 노동자셨기 때문에 당시 남기신 사진을 가져온 것입니다. 리비아로 발령 받자마자 제 뇌리를 스친 사진이 바로 아버지 사진이었고, 30년 만에 아들이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남기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현장을 벗어날 수가 없었고, 너무 짧게 머문 탓에 미션을 완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신 튀니지에서 잠깐 머무는 동안 국립 박물관에 가서 최대한 비슷한 사진 하나를 남기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참고로 제가 방문했던 튀니지의 국립 박물관은 카르타고 국립 박물관 (Carthage National Museum)이었고, 제가 이용했던 국제 공항 이름이 튀니스 카르타고 국제 공항 (Tunis–Carthage International Airport)이었습니다. 튀니지의 수도가 튀니스이고, 아주 오래 전에 책에서 스치듯 봤던 카르타고 제국이 바로 튀니지 땅에 있었다고 하는 것을 탈출하고 나서 택시 기사에게 들었습니다. 영어 스펠링이 Carthage여서 뭐라고 읽는지 조차 몰랐는데 사전을 찾아보니 카르타고라는 것을 나중에 박물관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잠시 둘러보고는 곧바로 우리는 호텔에 와서 그동안 미뤄둔 잠을 몰아서 잤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일어나 공항에 가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고 탈출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튀르키예 이스탄불 공항에서 경유한 뒤 인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고 6개월간의 여정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에 돌아온 뒤에야 알았습니다. 리비아 한국 영사관 직원들이 우리보다 먼저 탈출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한국 언론에 아주 잠시 지나가는 기사로 나와 있었는데 제가 탈출한 날짜보다 한참 앞이었습니다. 저는 2014년 당시 정부와 외교 관계자들에게 불만이 정말 많습니다. 어떻게 우리보다 먼저 탈출할 수가 있는지 따져 묻고 싶습니다. 당시 리비아에 있던 우리에게 조국은 없었습니다. 중국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는 정말 어떻게 되었을지 감히 상상도 안 됩니다.
벌써 9년 전입니다. 내년이면 탈출한지 10년이 됩니다. 이제는 꿈만 같은 기억이고 술 한잔 하며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는 단골 레퍼토리가 되어버렸지만 당시 저는 정말 죽음의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습니다. 평생에 다시 경험하기 힘든 나름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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