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관리 전문가 (Project Management Professional) 자격증을 공부할 때 교과서 격인 PMBOK (Project Management Body Of Knowledge)이라는 책을 보면 프로젝트에 대한 정의는 “Project is a temporary endeavor undertaken to create a unique product, service or result.”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해 보면 “프로젝트란 유일한 제품, 서비스, 결과를 생성하기 위해 들인 일시적인 노력이다.” 정도가 알맞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단어는 ‘일시적인 (temporary)’과 ‘유일한 (unique)’입니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 같아도 매번 조금씩 변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의 프로젝트는 시작을 했으면 언젠가 끝이 나게 됩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중단되든, 취소되든, 어떻게든 끝이 나기 마련입니다. 프로젝트 관리의 개념과 체계적인 기법들은 모두 미국 나사 (NASA)의 우주선 개발 프로젝트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로부터 프로젝트라는 것이 얼마나 관리하기 힘들었으면 관리 좀 잘해보자고 프로젝트 관리라는 개념을 만들었을까 싶습니다.
제가 PMP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공부한 이유는 국내 1위의 토목 설계 회사를 다니면서 맛본 좌절감, 허탈함, 상실감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직을 결심하고 절박한 심정도 있었지만 가장 큰 동기는 “이렇게 잘나가는 회사가 왜 이 모양 이 꼴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의 프로젝트, 여러 개의 프로그램과 포트폴리오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공부를 하다 보면 이해가 될 거라고 생각했고 제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회사의 조직 문화와 체계가 한마디로 엉망이었습니다. 토목 엔지니어링 회사의 경쟁력은 결국 기술력이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엔지니어링 업계의 구조 자체가 수주 위주로만 되어 있어서 회사 내 임직원들의 개별 기술력이 매우 부족했습니다. 부족한 기술력을 외주로 메우고 단가를 후려쳐 중간 마진을 먹는 일이 많았습니다. 업계 1위의 수주 실적은 외주 업체들과의 공생 또는 기생 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직원들은 하루 종일 전화통만 붙잡고 외주 업체에 업무 지시를 하거나 일정을 독촉하는 것이 업무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임원들은 수주를 위한 영업력만 있을 뿐 기술력이 부족했고 프로젝트 관리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욕지거리와 갑질이 비일비재했었습니다.
기술력은 부족한데 수주는 잘하니 직원 1명당 2~3개 프로젝트는 기본으로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프로젝트 하나에는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있었는데 너무 많아서 문제였습니다. 토목 설계는 보통 지자체나 공공기관이 발주처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발주처 관계자만 최소 3~4명이고, VE (Value Engineering, 가치공학) 심의, 인허가, 환경영향평가 등을 거치면 몇 배로 이해관계자들이 늘어납니다. 사내에도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이사, 상무, 전무 등의 이해관계자들이 존재합니다. 이해관계자들이 많아지면 의사소통 채널이 복잡해지고 설계 변경이 잦아지게 됩니다. 누군가 어떤 목적에서든 검토를 하게 되면 아주 일부라도 수정을 해야만 검토했다는 티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변경은 직접하기도 하지만, 결국 외주 업체에 변경을 지시합니다. 변경 관리 자체가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런 구조이다 보니 리스크 관리도 무조건 회피나 전가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일정관리와 비용관리 등은 납품 기한만 무조건 맞추면 될 뿐 체계적인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착수 (initiating), 계획 (planning), 실행 (executing), 통제 (controlling), 종료 (closing)로 구성된 프로젝트 관리의 개념이 아예 없는, 그리고 관리 자체가 불가능한 어처구니 없는 업무 방식도 존재합니다. 대한민국 엔지니어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른바 ‘합사’ (합동 사무실의 줄임말)입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직원들을 보내서 단시간에 큰 돈을 버는 소중한 업무 형식이겠지만, 엔지니어들은 최소 두세 달에서 최장 1년 넘게 노예로 살아야 합니다. 집에도 가지 못하고 매일 야근과 철야를 반복합니다. 보통 시공사와 컨소시엄을 맺거나 해서 입찰에 함께 참여하기 위해서 합사를 차리고 단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제출 서류와 도면 등을 작성합니다. 그래서 시공사의 노예가 되어야 하고 퇴근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시공사 직원들은 설계사에게 업무 지시를 하고는 술을 마시고 오거나 헬스장 또는 골프 연습장에 다녀오기도 합니다. 그렇게 돌아와서는 설계가 틀렸네 어쩌네 하면서 다시 하라고 합니다.
얼마 전 토목 엔지니어인 지인에게 들었는데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문제점들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기록에 남기지 못하는 야근과 철야도 여전하고, 생계형 야근도 여전하고, 합사의 잔인함도 여전하다고 합니다. 입찰 제도 자체가 서로 기술력으로 겨루도록 바뀌어야 합니다. 엔지니어링 회사가 기술력을 갖춰야만 수주가 가능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전관예우나 부정한 방식의 담합 등도 근절되어야 합니다. 사실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토목 엔지니어링 업계는 예전부터 문제가 많았습니다.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할 텐데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고 있어 미국토목기술사이자 대한민국 토목 엔지니어의 한 사람으로서 실로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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