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대기업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고 40대 중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경력직으로 입사했습니다. 저의 사회생활은 나름 치열했지만 초라하게 시작했습니다. 2001년 대학을 졸업하던 당시를 전후로 건설업계의 불황은 역대급이었습니다. 선배님들은 4학년 중간고사 즈음에 취직이 되어 기말고사도 치르지 않도록 배려도 해주던데 IMF의 여파로 당시 건설업계 순위 100위 안에 있던 회사들이 신입 공채를 한 명도 뽑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취업의 문이 좁았습니다. 그나마 취업에 성공했던 친구들을 보면 이른바 ‘아버지 찬스’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일단 사람을 뽑지 않으니 졸업식을 하던 당시 저는 이미 6개월 가량 취직을 못하고 있던 터라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교수님 한 분께서 자신의 대학원으로 오라고 감사한 제안을 주셨지만 이미 아버지께서 제가 졸업할 나이가 되니 일손을 놓고 계셨던 터라 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더 느긋하게 때를 기다리거나 아예 공기업 시험 준비를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당시에는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자신 있을 때라 공무원이나 공기업 시험 준비를 했다면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보며 친구들도 같은 말을 자주 하곤 했었습니다. 아르바이트라도 하면서 때를 기다렸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당시의 저로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마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저는 저의 시야를 좁혀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선배들로부터 술자리에서 앞으로의 진로 선택을 위해 시공이냐 설계냐 선택해야 한다고 들었고, 고민도 별로 하지 않고 설계를 하기로 마음 먹고 있었습니다. 저는 설계를 해야만 엔지니어라고 생각했었고 이미 오토캐드라는 프로그램을 혼자서 독학을 수년 동안 해왔던 터라 더욱 설계가 자신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서 공무원은 정말 공부 못하는 애들이 할 것 없어서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팽배했었습니다. 믿을 수 없겠지만 그때는 그랬습니다. 누군가 공무원 시험 보겠다고 하면 친구들이 술 사주면서 왜 인생을 포기하려고 하느냐고 걱정해주던 시대였을 정도니까요. 그러니 선배들이 시공이냐 설계냐만 물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토목 엔지니어들은 시공을 선택해서 돈은 많이 벌지만 지방을 돌아다녀야 하고 가족과의 화목함은 포기해야 하거나, 설계를 선택해서 돈은 못 벌어도 서울에서는 일할 수 있지만 야근이 많아 가족과의 화목함은 포기해야 한다는 두 가지 선택지를 강요 받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토목은 가족은 포기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여기에 저는 시공을 하는 건설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엔지니어가 아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도면을 보며 짓기만 하니까요. 부족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지만 당시 저는 엔지니어에 대한 큰 꿈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설계 회사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건설사들의 신입 공채가 없어도 스트레스가 남들보다 덜 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설계 회사들도 신입 공채가 없었기 때문에 구직 활동 자체가 불가능한 시기여서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치열하게 살던 저에게 경력직으로 대기업 입사 기회가 왔습니다. 늦은 나이여서 더욱 소중한 기회였기에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설계 회사를 다닐 때 대기업 출신 상사가 대기업 별 거 없다면서 차라리 중소기업이 낫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대기업 입사라는 달콤한 제안을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입사하고 벌써 4년 반이란 시간이 지났습니다. 지나고 보니 예전에 상사가 대기업 별 거 아니라고 했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기도 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니 별 거 없는 것은 맞지만, 역시 대기업은 무조건 경력에 한 줄 넣는 것이 좋다는 결론입니다. 길면 길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신기했던 경험은 처음 3년간 느꼈던 ‘안정감’이라는 감정입니다. 그 전에 직장 생활 17년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습니다. 중소기업에 다니면 뭔가 항상 불안하고 불만이 가득한 느낌 뿐이었는데, 대기업은 왠지 모를 안정감이 포근하고 행복하기까지 했습니다. 언젠가 하루는 술 한잔 마시고 늦은 저녁 집에 터벅터벅 걸어가던 중 갑자기 뜻 모를 행복감이 밀려왔던 느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모든 게 감사하고 좋았습니다. 제 어깨를 툭툭 쳐주며 그 동안 고생했다고 말해줬습니다. 처음 3년간은 그랬습니다.
이후 지금까지는 거의 지옥 수준입니다. 대기업은 제가 혼자서 일을 잘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조직이 성과를 못 내니 가차없이 임원이 하루아침에 짐을 싸서 집으로 가고, 직원들을 갈갈이 찢어 다른 계열사로 보냈고, 일부 직원들은 아예 사표를 내고 이직을 하더군요. 한순간에 조직이 없어졌다 생겼다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행복한 안정감이란 조직이 성과를 내고 있거나, 이제 막 생겨난 조직이어서 성과가 없어도 봐주는 기간이거나 둘 중 하나에만 해당한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물론 해고는 웬만해서는 하지 않으니 버티면 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특히 저와 같이 엔지니어 마인드가 강한 사람에게 완전히 다른 업무를 던져주면 나가라는 소리인 것이 분명한 것이어서 자존심이 상해서 오래 버티지를 못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저는 여기서 벌써 1년째 완전히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다른 계열사로 전배 보내지도 못하는 신세였나 봅니다. 팀에 25명 정도가 있다가 이제 3명만 남았고 그 중 저는 막내입니다.내일 모레 50살인데 막내라니 기가막힌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전의 저였다면 1년 전에 당장 사표 내고 나갔을 것입니다. 엔지니어가 쪽팔리면 안 되니까요. 어디 가서 굶어 죽을지언정 이렇게는 일 못한다고 살았던 게 저였는데 어쩌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회사에서는 분명히 나가라는 시그널을 줬는데 버티고 있으니 눈치가 보이는 데다가 이렇게 버틸 성격도, 성향도 아닌 탓에 스트레스가 많은 요즘입니다. 독서와 공부는 계속하고 있지만 내가 무엇을 위해 이래야 되나 하는 의구심만 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래 버티긴 힘들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버티는 이유는, 첫째, 가족들 때문입니다. 대기업에 다니면서 느끼는 행복한 안정감이 비단 저만 느끼는 게 아닌 모양입니다. 가족들이 남편이, 아빠가, 아들이, 사위가, 매형이, 형부가 대기업에 다닌다고 주변에 자랑까지 하면서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을 강제로 중단시키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무슨 말만 하면 역시 대기업이어서 그런 것이라고 하니 힘들어 하다가도 꾹 참게 되는 것 같습니다. 둘째, 아버지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요양원에 계셔서 많이 안 좋은 상황이 되고 보니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이직에 의한 환경 변화를 제가 원치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대기업에 있을 때 장례를 치러 드리고 싶은 속물 같은 생각까지 들기도 합니다. 셋째, 아직 입사한지 5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직을 벌써 공식적으로 3번, 비공식적으로 4번 했으니 더 이상 경력에 회사 이름을 하나 더 넣고 싶지는 않지만, 만약 더 넣더라도 5년 이상 일한 경력을 넣고 싶기 때문입니다. 너무 자주 옮겨 다닌 것이 때로는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최대한 버텨서 기간이 긴 경력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아마 위 세 가지를 동시에 포기해도 좋을 만큼 크게 좌절을 겪거나 자존심이 상할 때, 또는 위 세 가지를 포기할 만큼 좋은 기회가 생길 때, 퇴사하고서도 위 세 가지를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길 때 저는 사표를 낼 것 같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일하며 제가 내린 결론은 대기업에 다닌다는 것은 분명 ‘별 거’지만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다녀야지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최적의 직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특히 엔지니어들에게는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대기업에서 일한 경험은 없는 것보다 있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율배반적인 얘기 같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테니 그때 다시 얘기를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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