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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엔지니어] 혁신과 변화가 통하지 않는 조직에서 관찰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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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을 읽으시면서 제가 다니는 회사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지 않고 있음을 의아해 하실 분들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동료 직원들이 알게 되어 제글을 읽는 것이 아직은 좀 부끄러운 생각도 들고, 회사의 보안 정책에 위반되는 말을 실수로 하게 되지 않을까 해서 꺼려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간단히만 말하면 석유화학 제품의 원료를 생산하는 제조업을 본업으로 하면서 다양한 신사업에 투자도 하고 있는 회사 정도로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렇게만 말씀 드려도 대충 몇 개로 간추려질 테지만 이 정도에서 모른 체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제가 몸담고 있는 대기업 내의 조직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회사마다 각자의 문화와 철학에 따라 조직이 운영되다 보니 자신이 맡고 있는 업무의 전문성과는 별개로 조직 문화에 적응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조직 분위기는 신생 회사일수록 젊고 유연하다는 느낌을 받고, 수십년 동안 강자로 버텨온 기업일수록 느리고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최근 혁신을 경영 목표의 최우선으로 삼고 있어서 젋은 임원들이 보이기도 하면서 뭔가 변화의 바람이 부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속에서 일하는 입장에서는 큰 틀은 바뀌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바뀌고 있다고 하더라도 변화의 속도가 너무 느려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회사가 딱 그런 곳입니다. 오랫동안 업계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위를 점해왔고, 많은 경험을 갖고 있다 보니 큰 변화를 두려워하고 보수적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마치 한 사람의 인생과 같습니다. 젊었을 때는 호기 넘치고 열정적으로 뭐든지 도전해 보다가 실패하면 또 도전하지만, 나이가 들면 뭔가에 선뜻 도전하기 보다 본해 해오던 것에 집중하게 되니 보수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 같습니다.주식 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공격적으로 투자하길 선호하지만, 나이 든 사람들은 가진 것을 잃으면 다시 복구하기 힘들다는 생각으로 대단히 보수적으로 투자하는 성향을 보입니다. 기업도 이와 정확히 같습니다. 저희 회사도 몇십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어 봤으니 변화 보다는 유지를 선호합니다. 여기에서 받아들인 변화들도 매우 독특한 형태로 변형되어 운영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전자 결재 시스템입니다. 예전에는 결재판에 결재 서류를 넣고 정갈한 자세와 복장으로 결재권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굽신거려야 간신히 결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재를 받기 위한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 과다하게 소모되므로 전자결재 시스템은 매우 간편하고 간소해서 좋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뭐가 달라졌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결재의 종류에 따라 결재를 상신하는 저부터 최종 결재권자까지 결재 단계에 9명이 있기도 합니다. 제가 8명에게 결재를 받아야 하는 것인데 결재 상신도 곧바로 하지도 못합니다. 중간 결재자들이 각자의 직속 상사에게 보고해야 하니 상신 전에 먼저 보고 받고 검토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럼 저는 일일이 찾아 다니며 결재 내용을 설명하고, 설명을 들은 분은 자신의 직속 상사에게 보고하고, 또 그 상사에게 제가 보충 설명 드리면, 다시 직속상사에게 구두 보고 해야 합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절차를 거치고 드디어 상신 버튼을 누르면 중간 결재권자들이 제가 상신한 문서들을 고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올리면 위에서 싫어하신다, 이런 표현보다는 저런 표현이 좋다, 뭔가 내용을 더 보충해서 와라 등 이유도 많습니다. 그렇게 몇 명이 고치다 보면 제가 보고하고자 하는 내용과 달라지거나, 아예 제가 처음 올린 내용으로 다시 돌아가 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바로 결재도 안 합니다. 회의가 있어서 못하고, 손님이 와서 못하고, 외근 나가 있어서 못봤고, 다른 일 하느라 늦어졌고 등의 사유로 5일 이상 걸리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최종 결재가 완료되고 나면 온 몸에 힘이 빠지고 녹초가 되어 버립니다. 이럴 거면 뭐하러 전자결재 시스템을 운용할까요? 차라리 제가 처음부터 과거와 같이 결재판을 들고 다녔으면 시간이라도 아낄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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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PMP (프로젝트 관리 전문가)로서 진단하자면, 권한의 위임이 제대로 되지 않은 탓입니다. 오래되고 보수적인 조직일수록 권한의 위임이 더욱 세분화되어야 하고, 확실해야 하며,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덩치가 클수록 업무의 양도 많고 업무의 범위도 비례하여 넓기 때문입니다. 위임전결 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내용이 모호하고 구체적이지 않아서 매번 애매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고, 애매하면 책임은 지기 싫고 하니 결재를 9명씩이나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업이 커도 불필요하거나 고의 또는 실수로 지출하게 되는 비용을 막자는 취지라고 반론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현업 부서에서 한 달에 14,000원짜리 태양광 발전소용 무선 인터넷을 개통하는데 통신사 약관에 대한 법무검토를 2주 거치고, 통신사 가입 신청에 대한 결재에 9명이 달려들어 결재를 하는 것이 과연 그 취지에 부합하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비용을 통제하고 아주 작은 업무도 관리해야 한다는 취지만 받아들였을 뿐, 이후의 적절하고 철저한 권한 위임은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시행착오를 좀 겪더라도 감내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으로 권한을 부여하고 위임해야 합니다. 권한을 부여받지 못한 중간 관리자가 의사결정도 못하고 위에 계신 최종 의사결정권자 한 분만 쳐다보며 살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조직에서는 변화의 바람이 불어도 옷깃만 살짝 스칠 뿐입니다. 프로세스가 확실하게 정착되지 못하고 소수의 의사결정권자에게만 의존하게 되는 경향이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결정권자는 영원한가요? 매년 바뀌거나 심할 때는 1년에 3번 바뀐 적도 있습니다. 의사결정권자에 의해 돌아가는 조직에서 의사결정권자가 바뀌면 구성원들 모두가 패닉에 빠집니다. 하던 업무를 중단하고 새로 오실 분의 성향과 이력을 파악합니다. 의사결정을 하실 분이 안 계시니 아무도 의사결정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모두가 매달려 업무보고 준비를 합니다. 시간이 지나 의사결정을 요청하면 전임 의사결정권자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탑다운 (Top-Down) 방식 일변도의 조직에서는 프로세스가 정착되거나 혁신을 추구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대기업에 오면 PMP로서 배우면서 시도해보고 싶었던 것들이 참 많았는데 요즘은 언감생심 (焉敢生心) 꿈도 꾸지 않고 있습니다. 어차피 저도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보수적으로 성향이 변하게 될 테지만 이런 곳에서 일하다 보니 보수화의 속도만 점점 더 빨라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도전하는 게 두렵고 겁이 나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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