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우리 가족이 서울 둘레길을 걷게 된 계기에 대해 얘기 썼습니다. 쓰고 나서 보니 와이프가 잔소리가 많다고 험담한 것은 아닌지 마음에 계속 걸리더군요. 사실 우리 가족은 너무나 화목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딸 아이가 스트레스가 심해져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서 제가 가족의 행복을 위해 잠시 나선 것 뿐입니다. 와이프는 제가 오랜 해외 생활에도 독박 육아를 하면서도 시간을 쪼개서 공부를 하더니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유능한 토목 엔지니어입니다. 경력 단절로 4~5년 육아만 하며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마침 제가 살인적인 야근과 해외 파견 근무 등으로 육아는 거의 도와주지 못했었습니다. 아마 그 벌을 제가 지금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육아라는 것이 원래 스트레스가 심하지만 제 와이프는 좀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요리뿐만 아니라 집안일을 잘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거의 한국사회의 전형적인 아빠 스타일을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와이프가 가끔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고 하면 아이와 저는 바짝 긴장해야 합니다. 짜증을 내고 뭐라고 소리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예 제가 먼저 나서서 준비하거나 배달 음식을 주문합니다. 가족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저는 맞서서 싸우지 않습니다. 짧은 인생 뭐하러 싸우나 싶습니다. 한 사람이 희생하고 양보하면 될 일을 굳이 싸워서 이긴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게다가 와이프와 저는 결혼 후 5년간 부모님 두분을 모시고 살았고, 8년을 더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으니 총 13년간 시부모님과 살았습니다. 나름 집안 사정으로 어쩔 수 없었지만 저는 와이프에게 뭐라고 말할 자격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견뎠을까 싶습니다.
와이프는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나름 인정을 받고 있는 모양입니다. 진급도 하고 상장도 받아 옵니다. 그리고 제 덕분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가지게 되어 처음에는 수영을 배우더니 나중에는 배드민턴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동네에서 에이스라서 무슨 대회만 나가면 경품으로 가방이나 쌀을 받아오고, 상장이나 트로피 같은 것들을 받아 옵니다. 보통은 한국사회에서 아빠들이 주말에 한 번 나가면 낚시, 골프, 축구 등으로 집에 안 들어오는데, 우리집은 와이프가 그렇습니다. 항상 저에게 다녀와도 되냐고 형식적으로 묻곤 하는데 저는 흔쾌히 보내줍니다. 와이프는 그렇게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고, 아이와 저는 서울 둘레길을 돌거나 집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풉니다. 와이프도 연애할 때나 결혼 초기에는 아침 잠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저의 영향으로 아침 시간에 뭔가를 하다 보니 하루가 무척 길게 느껴지는 기분을 한 번 느끼고 나서부터 금방 적응했습니다.
제가 그 동안 인생의 전환점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와이프는 저에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조언을 해줍니다. 저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제3자의 시각으로 저의 장단점에 대해 얘기를 해주면 큰 도움이 됩니다. 때로는 완전히 제 편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을 해도 그렇게 말을 해주니 서운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정신 바짝 차리게 되고 도움이 됩니다. 다른 집들과 비교하면 분명 아내와 저의 역할이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이 자주 듭니다. 자동차도 거의 와이프가 출퇴근과 운동으로 전담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같이 드세고 까다로운 사람 만나 결혼해준 것만 해도 평생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서로 부족한 부분은 맞춰가며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엄마로서 딸아이와의 정서적인 교감이 부족한 부분이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고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 곳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또 다른 곳에서는 유리한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맞추면 될 일이니 괜찮습니다. 만약 제가 주말마다 나가기 시작하면 서로 스트레스가 심해지겠지만 저는 당분간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은 아이와 함께 지내며 맛있는거 해주면서 수다 떠는 게 더 좋습니다. 엄마의 역할을 누군가는 해줘야 하니까요. 언젠가 아이가 혼자 있길 더 좋아하거나, 친구를 만나러 나가기 시작하면 저는 가장 먼저 서울 둘레길을 혼자서 돌아볼 생각입니다. 저 혼자만의 시간도 가질 수 있고, 또 가장 저렴한 취미가 바로 서울 둘레길 트레킹이기 때문입니다. 당장은 돈을 모아서 가족을 부양하고, 남는 돈은 저축해서 집을 사야하는 막중한 마지막 과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돈 관리도 제가 하고 있는데, 제가 쓰기 시작하면 정말 답이 안 나오더라고요. 다행히 취미가 바둑, 독서, 서울 둘레길이니 차비와 책값만 빼고는 소비생활을 거의 하지 않는 편입니다. 물론 술은 많이 마시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코로나 사태로 예전만큼 약속이 많지도 않고, 마시더라도 회사에서만 먹으니 제 돈이 들 일이 없습니다. 혼술도 적응하고나니 나름 괜찮다는 생각도 듭니다.
코로나 이전처럼 비정기적이지만 셋이서 여행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요즘 간절합니다. 여행 가서 맛있는 것도 사먹고, 예쁜 것도 많이 보고, 행복하게 사진으로 추억을 남길 수 있어서 참 좋아했는데 요즘 가족 사진은 온통 마스크만 쓰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사랑하는 두 사람과 함께 조만간 어디라도 계획없이 훌쩍 다녀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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