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정도 전에 저는 사회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초보 토목 엔지니어였습니다. 멋모르고 덤비기 일쑤고 열정 넘치는 청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 지금 제가 그런 직원을 봤다면 뭣도 모르는 놈이 설치고 다닌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4년차 쯤이었나 싶은데 어느날 갑자기 당시 과장님이 제 책상에 족히 몇 백장은 되어 보이는 서류 뭉치를 던져 놓고 가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가시면서 “이번에 뽑을 신입 채용 이력서인데 네가 한 번 보고 면접 볼 사람들 추려서 가져와.” 하시는 겁니다. 아니 제가 사회 생활 얼마나 했다고 감히 다른 사람의 인생을 평가한다는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본인이 너무 바빠서 그러니 어차피 자신도 보기는 볼 텐데 미리 제 나름의 기준으로 점수를 매겨주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을 하더군요. 자신의 할 일을 남에게 미루는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업무도 보통 업무가 아니라 직원을 채용하는 업무인데 이렇게 책임감 없이 일을 할 수가 있나 싶었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고 화가 납니다.
하는 수 없이 당시 사회의 암묵적인 신입 엔지니어들의 채용 기준이 토목기사 자격증, 토익 700점 이상, 학점 평균 3.5 이상으로 기준을 삼고 분류하기 시작했습니다. 분류하다 보니 태어나서 다른 사람의 이력서를 보는 것 자체도 처음이지만 이렇게 많은 이력서를 자세히 들여다 보는 것도 역시 처음이었습니다. 전공은 모두 저와 같았지만 정말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인생들을 살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모두 참 열심히 살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구나’ 라는 것입니다.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결국 사회의 잣대인 토목기사 자격증, 토익 700점 이상, 학점 평균 3.5 이상인 사람들이 100여명 중 80%가 넘었습니다. 10%는 그런 기준도 충족 못한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10%는 세 가지 기준 외에 차별화된 뭔가를 가진 구직자들이었습니다. 자격증이 한 개 이상이거나, 토익 점수가 특별히 높거나, 학점이 4.0을 넘거나, 아예 독특한 이력을 가졌거나 하는 식의 차별화된 사람들 말입니다. 속으로 저도 80% 안에 있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력서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력서란 사회에 ‘나’라는 상품을 내다 팔 때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해줄 수 있는 디자인과 포장지 역할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름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정래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옷을 살 때 디자인은 보지도 않고 그저 명품 가게에서 팔면 비싸도 그냥 믿고 사게 되는 옷은 소위 SKY 대학교에 비유했습니다. 나머지는 중가와 저가 옷 가게에서 옷을 살 때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샀다가 후회하기도 하고, 별 생각 없이 입을 옷이 없어 샀는데 점점 마음에 들어 하는 것으로 생각해봤습니다. 이력서도 그런 디자인과 포장지로 자신을 홍보하고 보기 좋게 포장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사람을 상품에 비유하거나 비윤리적으로 사고 파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에는 일말의 죄책감은 가지고 있지만 현실에 대한 풍자나 메타포 (metaphor) 정도로 생각해 봤던 것뿐입니다. 이렇게 중요하고 얼마나 정성을 들여야 할지 가늠하기 힘든 문서인데 오타가 많은 이력서들이 참 많았습니다. 실수로 한 두개가 아니라 한두줄 마다 하나씩 있을 정도의 이력서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의 이름이 서로 달랐습니다. 아마 자기소개서를 어딘가에서 베낀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다들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어디선가 읽어봄직한 좋은 글귀들을 인용하고 유명 인사의 어록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많이 깨달았습니다. 내가 이 정도로 생각하는데 나보다 더 나이 많으신 인사 담당자들은 훨씬 심각하다고 느끼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년 제 이력서를 업데이트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나를 포장하는 포장지라면 이 세상에서 나를 표현하는 가장 완벽한 문서여야 하고, 매년 업데이트를 하다 보면 경력 1년 늘어나 숫자 바뀌는 것 말고 자격증을 새로 취득한다던지, 새로운 분야에 대해 공부를 했다던지, 하다 못해 프로젝트 수행 경력 기술이라도 늘리려고 1년간 노력하게 됩니다. 이후로 저는 후배들이나 부하 직원들이 인생 상담을 해오면 잔소리처럼 이 얘기를 꼭 해줍니다. 이력서부터 업데이트 하라고 말입니다. 곧바로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적는 이력서가 아니라 1년 동안 나는 내 이력서에 추가하기 위해 무슨 노력을 했는지 반성하기 위한 업데이트입니다. 아마 거의 대부분 경력 1년 늘어난 것 말고는 특별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계획을 세우고 무엇을 추가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저처럼 자신의 스펙이 명품 브랜드에서 파는 옷이 아니라면 디자인이라도 잘해서 남들 눈에 잘 띄게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경력직의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업 입장에서 신입은 앞으로 뭘 할 수 있을지 미래에 투자하는 것이라면, 반면에 경력직은 과거에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를 보고 투자할지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신입은 여러 방면에 지원할 수 있지만 경력직은 매우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께도 권해 드립니다. 자신의 이력서를 찾아 매년 업데이트 해보십시오. 과연 자신이 지난 1년간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일기, 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이 아니라 자신의 이력서에 추가해 보시기 바랍니다.
위에서 제가 20년 전에 100여명의 이력서를 검토한 결과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SKY 대학 출신인지 아닌지는 제가 그쪽 출신이 아니어서 그런지 가산점은 1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격증, 토익, 학점 등의 3가지 기준에 만족하면 일단 C, 이외에 뭔가 차별화된 점이 있으면 B, 정말 특별한 구직자는 A를 줬습니다. 그렇게 간추렸더니 10명 정도로 압축되었습니다. A는 단 한 명이었습니다. 그렇게 과장님께 전달했더니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A는 왜 단 한 명이야? 얘는 뭐 특별한 거 없는데?” 하시길래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기소개서 보면 대학 때 야학 동아리를 했다잖아요.요즘 세상에 4년 내내 야학 선생님을 하는 대학생이 어디 있나요? 이런 사람이면 분명히 일 잘할 겁니다. 사회에서 성공을 하고 나서도 이런 생각을 할까 말까인데 이미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무조건 일을 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본인 기준으로 몇 명 더 추가해서 사장님 면접까지 10여명을 봤는데 결국 제가 A를 준 사람만 혼자 신입으로 입사했습니다. 제 예상대로 일을 잘했고, 저는 아직도 그렇게 일 잘하는 엔지니어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지금의 제 아내입니다. J
[글 쓰는 엔지니어] MBTI와 바넘효과 (0) | 2023.02.01 |
---|---|
[글 쓰는 엔지니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주년에 즈음하여 (0) | 2023.01.31 |
[글 쓰는 엔지니어]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는 능력 (0) | 2023.01.29 |
[글 쓰는 엔지니어] 블랙 아웃과 화이트 아웃, 그리고 기후변화 (0) | 2023.01.28 |
[글 쓰는 엔지니어] 하이라이트 (highlight)와 스포트라이트 (spotlight)의 차이 (1) | 2023.01.27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