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이불루 화이불치 (儉而不陋華而不侈)라는 말이 있습니다. 차이나는 클라스라는 예능에서 유홍준 교수이자 전 문화재청장이 출연해서 했던 말인데, 듣자마자 감탄했습니다. 분명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을 텐데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느껴졌고 무릎을 치게 만들었던 문구였습니다.
찾아보니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백제 온조왕의 궁궐을 일컬으며 썼던 표현이라고 합니다. 이후 조선경국전에서 정도전이 궁궐과 관련하여 김부식의 글을 인용하여 사용했다고 합니다. 정확한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 (儉而不陋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우리 조상들의 학문적 깊이와 지혜를 느낄 수 있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중용 (中庸)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온몸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개념이었습니다. 살다 보니 얼핏 무슨 말인지 깨닫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철학의 깊이가 깊은 분들처럼 완전히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지금도 중용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검이불루 화이불치도 그렇고 중용도 그렇고 균형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20대와 30대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균형 감각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느끼고는 있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라던가,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고" 같은 말을 균형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이 말들도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40대로 접어들면서 아주 조금 생각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제가 뭐라도 된양 생각의 깊이가 깊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방향을 조금 다르게 설정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알고 있던 균형에 관한 표현들은 중용,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고 등이었는데 모두 단편적인 행위에 관한 표현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뭔가를 선택하려고 할 때 선택의 결과가 곧 균형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40대 이전까지는 시야도 좁아서 옷을 고를 때 내가 내 분수에 맞는 저렴한 옷을 고르는 것이 균형이라고 생각했었다면, 40대 이후에는 단순히 옷만 고르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소비 지출 현황, 내가 처한 환경, 내 나이, 직장과 가족들의 예상 평가 등을 고려해서 어느 정도 지출 규모가 정해지는 새로운 개념의 균형 감각이 생겼습니다.
일례로, 40대로 접어들면서 더 높은 목표를 위해 이직을 준비 중이었을 때 2차 경영진 면접에서 시작하자마자 자기소개를 하라길래 "네이버, 다음, 구글에서 제 이름을 검색하시면 제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실 수 있는 OOO입니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면접관들로부터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임팩트를 주고 싶어서 미리 준비했던 멘트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조금 오그라들긴 하지만 어쨌든 확실하게 뇌리에 저라는 사람을 각인시키고 싶었습니다.
면접관들의 여러 가지 질문들과 갑작스러운 영어 질문에 나름 선방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질문으로 한 면접관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OOO씨는 자신 있는 태도는 참 마음에 드는데 너무 잘난 척하는 것 아닌가요? 평소에도 그런가요?" 일종의 압박 면접이었습니다. 그것도 예고도 없이 갑자기 질문을 받고 보니 당황스러웠습니다. 여기에서 40대 이전과 이후로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을 제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만약 40대 이전이었다면 저는 "평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 답변 태도가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제가 여기 계신 면접관님들보다 인생을 짧게 살았지만 세상을 40년쯤 살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은 밸런스를 맞춰가는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당돌하고 무례해보일 수도 있겠지만, 또 어떻게 보면 짧은 시간에 저라는 사람을 어필해야 하는 자리여서 절실함의 표현일수도 있으니 제 나름의 밸런스를 맞춰가는 과정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면접관들의 감탄하는 표정과 소리와는 무관하게 제 자신에게 놀랐습니다. 어떻게 준비하지도 않은 이런 말들이 나왔지? 말해 놓고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딘가에서 읽거나 들은 것 같지도 않고 순간적으로 어떻게 이런 말을 생각해냈을까 하고 제가 순간적으로 경이롭기까지 했습니다. 면접 결과 당연히 합격했고 입사하자마자 해외 현장에 파견되어 훌륭한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평소에 책을 좋아한 제가 저도 모르게 내공이 쌓였던 것이 순간적으로 에너지가 폭발하여 한 마디 문장으로 압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평소에 공부와 독서를 해두면 이렇게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하게 된다는 점을 저도 새삼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제가 한국 나이로 내년이면 50살이 됩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검이불루 화이불치라는 표현을 접했습니다. 세상을 한 걸음만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면 알게 될 표현이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탄했습니다. 물러나서 보아야만 세상을 넓게 볼 수 있습니다. 가까이 가는 것만이 깊게 보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천년 전 우리 조상들은 이미 세상의 이치를 알고 있었고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고민되시나요? 꼭 한 가지 선택만 생각하지 마시고 한걸음 물러서서 생각하세요. 그리고 잊지 마세요. 인생은 밸런스를 맞춰가는 과정입니다. 그저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 선택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그런 선택은 없습니다. 뭔가 잘못됐다면 우리 인생은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반드시 기회가 다시 찾아오게 됩니다. 그저 우린 즐겁게 그 기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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